남성과 여성이 명확한 경계 아래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신성불가침의 구분은 위세를 잃었다. 현대 사회는 ‘성’이 아닌 ‘개성’으로 개개인을 구분 짓고 이러한 변화 흐름에서 시각적 매체로서 패션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과거 패션은 성 구분의 기능적 역할에 충실한 반면 현재 패션은 개성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면서 기능보다 표현적 요소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서 남성은 표현주의를 수용하는 사회 변혁의 주인공이 됐다.
기능과 표현, 기능주의와 표현주의의 관점에서 패션사를 살펴보면 기능에서 표현으로 진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두 조류는 한 시대에 존재했고, 남성은 표현주의에 대한 자각이 여성에 비해 조금은 늦었다고 할 수 있다.
2차 산업혁명은 사회를 기계적 운용 체계로 뒤바꿨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사회가 급변하면서 적응과 생존이 중요한 삶의 중요한 과제로 부상해 기능주의가 득세했다. 반면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에 따른 불안과 이에 따른 개개인의 내면적 감정 변화를 탐미하는 표현주의가 기능주의에 대립하는 조류를 형성했다.
산업화 시대 사회적 성으로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시각적 도구인 옷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여성을 소유물로 여겼던 산업화 시대가 종말을 고하면서 옷은 사회적 성의 구별이 아닌 ‘남과 다른 나’ 혹은 ‘남과 같은 나’, ‘남과 같지만 다른 나’라는 표현적 역할이 중시됐다.
상투적이 아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패션은 태생부터와 경계와 경계의 변용을 내포한다. ‘감각이나 스타일의 의복이나 복식품이 집단적으로 일정한 기간에 받아들여졌을 때’1)라고 정의되고, ‘상류층 사람들 사이에 볼 수 있었던 유행으로 매너를 비롯해 폭넓은 생활 풍습’2)이 기원이다. 귀족, 양반이 득세하던 시대에는 패션이 계층의 경계로 특권층의 시각적 상징성을 부각했다. 이후 공식적 상류계층이 사라지면서 남녀의 경계 짓기는 패션이 사회에서 기능적 유용성을 갖는 이유였다.
남성은 상류와 하류의 경계에서 남성과 여성의 경계로 이동한 패션사 흐름에서 결정적인 직격탄을 맞았다. 산업혁명 시대를 기점으로 남성은 과거 귀족 시대의 화려한 장식주의 패션과 결별했다. 집에서는 가장으로서 사회에서는 산업혁명의 주역으로서 남성은 패션에서 자유 의지를 박탈당했다. 대신 명예인지 멍에인지 알 수 없는 사회적 지위의 표현만을 허락받았다.
과거 여성의 불편하기까지 한 과도한 사치 패션은 남편인 남성이 자신의 사회적 능력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3) 베블런은 ‘여자 자신이 아닌 주인, 즉 남자의 명성을 높이는 일’이라며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베블런의 주장대로 경제적 예속 관계에서 주인으로서 남성은 부인, 즉 여성을 통해 자신의 표현 욕구를 대리 충족해왔다.
남성들은 패션 파놉티콘에 자신을 가뒀다. 가정이자 사회에서 권력자의 지위를 보장받은 대신 표현의 자유는 여성의 영역으로 밀쳐냈다. 남자들의 주된 복식인 양복으로 불리는 정장은 마치 감옥에서 제공하는 죄수복처럼 일괄적이며, 옷과 수번의 색으로 범죄의 형태나 신분이 구분되듯 최소한 제한적 차이만 존재해 왔다. 이런 복식 체계는 권력 계층에서 각자가 어떤 지위를 부여받았는지 구분해 산업혁명 이후 기계적인 사회 운용의 근간을 형성했다.
이제 남성들은 일하는 ‘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표현하는 ‘개성’이라는 기준에 충실하면서 검은색, 회색, 남색의 경직된 신사복을 상징성만 존재하고 실용적 가치는 유명무실해진 한복처럼 옷장 구석으로 밀어냈다. 이러한 변혁은 남성과 여성이 경제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가능해졌다. 현재 남성들의 패션 사치 수준은 부인, 즉 여성의 경제력 수준과 비례 관계에 놓였다. 기계적인 기능성에서 적극적인 개성 노출로 방향을 틀은 남성들은 스스로 옥죈 패션 파놉티콘을 탈주해 시각적 매체인 패션을 통해 감춰온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은 타인의 평가적 시선에 노출됨을 전제로 한다. 남성들이 자신의 패션 파놉티콘에 가둔 채 여성들을 상품처럼 전시하고 평가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그 자리가 역전됐다.
이제부터 타인의 시선으로 뛰어든 남성들의 패션 연대기를 시작한다.
1) 두산백과 두피디아
2) 패션전문자료사전
3) 유한계급론 소스타인 베블런, 우물이 있는 집 2018, p219~220
*표지 사진 ; 영화 '검사외전'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