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얼도 실력으로 평가받고, 비주얼이 지배권을 갖는 세상, 지금 우리는 패션 이데올로기 시대를 살고 있다. 패션은 화려하고 가벼우면서도 한편으로 진지하고 무겁다. 이같은 패션의 다면성을 전제해야 화려하거나 처참한 비주얼 이면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패션은 사람의 판단 기준이 내면이 아닌 외면에 두고 있어 진지함이 결여됐다며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패션이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외면한 관점이기에 부당하다.
패션 여론의 가벼운 일면으로 평가받는 블레임룩(Blame Look)은 한편으로 편중된 관점만을 견지하면 의미를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범죄자나 용의자를 패피라는 평가를 내리게 하기도 하고, 추종 세력을 형성해 반영웅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처럼 반사회적 인물에 대한 소비적 일회적 표피적 관심으로 인식되기는 하나 이면에는 가벼이 넘길 수 있는 메시지를 품고 있다.
블레임룩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반영한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여론의 흐름을 움직여 명시된 죄 혹은 잠재적 죄를 크게도 작게도 하는 효과를 내 전략적 이미지 관리 도구로서 블레임룩이 활용된다.
여기서 하나 화두를 던질 수 있다. 자유분방하게 거침없이 개성을 드러내는 연예인들, 특히 남자들은 경찰이나 검찰 출두에서는 왜 항상 블랙 정장을 선택할까. 블랙 정장 중에서도 상갓집 문상을 위해 별도로 준비해 옷장에 한 벌 정도 구비하고 있을 법한 군더더기 없고 개성 없는 심플한 정장이 대부분일까.
남자들의 블랙 정장은 화장기 없는 까칠한 얼굴까지 더해지면 유명 배우나 가수의 아우라를 제거하는 효과를 낸다. 죄를 짓거나 의혹을 받는 입장에서 화려한 스타의 모습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스타로서 특권적 지위를 내려놓고 보편타당하게 적용되는 사회적 허용 범위에 귀속한다는 메시지가 깔려 있다. 또한 자신이 처한 상황의 무거움을 인지하고 성실하게 임하겠다는 비언어적 표현이기도 하다. 여기에 ‘최선을 다해 조사에 임하겠다’라는 입장 표명까지 하면 블랙 정장은 ‘막중한 책임감’이라는 이미지가 더해진다.
‘사회적 책임감 있는 남성’을 상징하는, 그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블랙 정장이 블레임룩의 드레스코드로 정착된 것은 예전의 남녀유별, 남성 권력시대의 잔재일수 있다. 무엇보다 대중이 주목하는 소비시장에서 트렌드를 선도하는 중심에 있는 인물들이 경찰이나 검찰청 포토 라인 앞에서 블랙 정장을 입고 굳게 닫은 입으로 참담한 표정을 짓는 것은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도 남성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이처럼 블레임룩이 보수적 가치로 귀의해 남성성의 전통적 가치에 충실하겠다는 의미 외에 의외의 메시지를 던지기도 한다.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버닝썬 게이트 최승현(이하 승리), 마약 사건 유아인은 블레임룩이 위와 같은 기본 전제도 개인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고 변용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승리는 버닝썬 게이트로 여러차례 포토 라인 앞에 서면서 다양한 블레임룩 착장을 보여줬다. 이중에서 더블 블레스티드 슈트를 입고 다부진 어깨를 쫙 펴고 당당하게 카메라 시선을 받는 모습은 익숙한 듯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환영받지 못하는 개선장군 처럼 힘든 전쟁에서 이기고 귀환했는데 정세 변화로 역모의 모함을 받지만 적이 된 아군 기지을 당당하게 뚫고 들어가는 기세로 읽히기도 했다. 부당한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해 나가겠다는 의지가 힘이 잔뜩 들어간 눈과 결혼식 예복처럼 보이는 더블 블레스티드 슈트 등 곳곳에서 묻어났다. 다소 치기 어린 이같은 모습은 버닝썬에 쏠리는 끝없는 관심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반면 유아인은 마약 투약 사건이 터지기 직전까지 SNS를 통해 보여주던 자유분방함을 넘어 다소 괴이하다는 평을 들은 모습과는 달리 기본 디자인의 반듯한 블랙 정장 차림으로 등장했다. 특히 화이트 셔츠와 적절한 폭의 타이까지 갖춘 블랙 정장은 사회가 규정한 전통적 가치에 충실한 남성성의 규칙을 따라는 듯 보였다. 의례적으로 블레임룩 공식을 따른 듯 보이나 그간 거침없는 발언과 파격적인 행보와 비교할 때 보수적 남성성으로 귀환은 색다르게 다가왔다.
승리와 유아인은 블레임룩으로서 블랙 정장이 누구나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같은 블랙 정장이라고 할지라도 전통적인 보수적 가치에 대한 충실성 수준으로 메시지는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서 더 나아가 블레임룩이 사회적 허용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기주장이 강하게 배어나온다면 어떤 결말을 초래할까.
블레임룩의 레전드 신정아는 2000년대 중반 럭셔리 브랜드에 대한 당시 사회의 반감과 연결돼 그가 저지른 범죄를 시각화하는 효과를 냈다. 공항에서 연행될 당시 입은 생지 느낌의 데님과 블랙 티셔츠에 베이지 아웃포켓의 캐주얼 재킷은 럭셔리 중의 럭셔리로 불리는 샤넬이나 에르메스가 아닌 30대 중반의 유명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고려할 때 있었을 법한 브랜드와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2007년은 IMF 고비를 힘겹게 넘기고 있는 시기여서 럭셔리 브랜드로 분류된다는 것만으르도 ‘명품으로 치장한 범죄자’라는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신정아의 ‘명품 블레임룩’은 ‘신정아는 누구인가?’의 질문에 대한 가설로 제기된 ‘리플리 증후군’을 확신으로 만드는 필요충분조건이 됐다. 한 여자가 평범하다 못해 보잘것없는 자신을 온갖 거짓으로 채운 후 명품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잘 포장된 상품으로서 여자는 상류층의 관심을 받고 자신이 타고난 상류층인 듯 행세한다. 그러나 상류층 가면은 누군가에 의해 덜미가 잡혀 벗겨진다. 대충 이런 스토리가 완성돼 대중의 관심이 길게 지속됐다.
‘명품 블레임룩’은 징역 1년 6개월형을 받은 학력 위조와 미술관 공금횡령 법률상의 범죄 외에 리플리 증후군을 반사회적 스토리로 완결하는 역할을 했다.
탈주범 신창원은 블레임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신창원이 2년여 간의 도주 생활 끝에 1999년 경찰에 체포될 당시 입고 있던 다부진 몸매를 꽉 조이고 있는 멀티컬러 티셔츠는 가품이었지만 특정 럭셔리 브랜드의 시그니처 패턴으로 ‘OOO 티셔츠’의 폭발적 인기를 몰고 왔다. 당시 가품이 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기이한 현상을 초래하기도 했다.
당시는 힙합이 주도하는 갱스터룩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힙합은 주류를 희화하는 비주류의 도발로, 1990년대 중반에는 경제적으로 거품과 위기가 교차되는 시기여서 럭셔리 브랜드를 비웃는 힙합 정신에 대한 공감도가 높았다. 따라서 탈주범 신창원이 입은 특정 명품 브랜드를 상징하는 멀티컬러 티셔츠를 입고 등장한 순간 2년여 간의 신출귀몰한 도주와 함께 반영웅주의 정서가 최고점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인기가 거세질수록 갱스터룩의 상징으로서 그의 모습은 ‘신청원=탈주범’으로 범죄자 낙인을 대중의 뇌리에 깊게 각인했다.
블랙 정장 블레임룩은 전통적 남성성의 꺼질 듯 꺼지지 않는 불씨는 아닐까. 포토 라인은 이슈를 만드는 이미지 메이킹의 전쟁터다. 만약 포토 라인이 처져있는 곳이 경찰이나 검찰청이라면 보수적 가치가 발휘하는 힘을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표지 사진 ; BBC 'Burning Sun: Exposing the secret K-pop chat groups' 유튜브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