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전시와 하나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 글을 올해 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미래과거를 위한 일] 전시 중 에두아르도 아바로아(Eduardo abaroa)의 <인류학박물관의 완전한 파괴>로 시작하고 싶다. 이 작품은 포스터, 실크 스크린 된 도면과 설명글, 비디오 영상, 건물 구조를 이루고 있던 재료인 나무 기둥, 유리, 돌무더기로 구성되어 있다. 넓은 전시장에 각각 다른 형식의 요소들이 놓여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모두 한 작품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일단 도면과 그 아래의 글을 살펴보았다. ‘어떻게 건물을 해체할 것인지’에 대해 순서에 맞게 실제적 지식을 바탕으로 제작된 일종의 설명서였다. 박물관이 가벼운 콘크리트 구조물이기에 폭파 해체 공법보다 유압 해머와 절단기가 달린 굴착기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는 등, 굴착기의 투입로, 크레인, 중앙 기둥의 해체 방식을 포함해 실무적 단계가 자세히 계획되어 있었다. 옆으로는 건물을 철거하는 현장 사진이 인쇄된 커다란 포스터와 건물의 이름이 음각으로 새겨진 돌무더기(사진에 찍힌 부분의 잔해)가 쌓여있었다. 모두 둘러보고 나자 이 작품은 어떤 건물을 해체하는 과정을 담은 일종의 기록 작업이라고 생각되었다. 한 걸음 옆에 크게 붙어있던 작품 설명을 보기 전까지는.
에두아르도 아바로아의 <인류학박물관의 완전한 파괴>는 멕시코 인류학박물관을 파괴한다는 가상의 계획하에 파괴의 물리적 과정을 다양한 매체와 결과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
나는 순간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이 정교하게 계획된 모든 것들이 가짜였다. 작가는 ‘박물관 바깥에서 투쟁하는 멕시코 토착 부족들이 처한 재앙적인 상황을 은폐하는 박물관’을 해체하는 이미지를 통해 저항한 것이다. 다시 벽면을 채우고 있던 커다란 포스터를 보니 포토샵으로 합성해놓은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은) 자국들이 그제야 눈에 띄었다.
이어서 다른 작품을 보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얼마 전 열린 [2018 아시아 기획전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에 전시되었던 티모테우스 앙가완 스쿠노(Timoteus A. Kusno)의 <호랑이의 죽음과 다른 빈자리> 역시 다양한 작업이 모여 하나의 작품이 된다. 자료 서적, 민담에 근거한 스케치, 미확인 생명체가 찍힌 (UFO 사진처럼 조작된 느낌의) 사진, 조각, (이집트 미라에서 나온듯한) 가면, 영상, 설치물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는 호랑이 영령이 씌워진 사람의 이미지와 이들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통해 해방 이후 인도네시아 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전체적인 이미지들의 느낌은 무시무시하고 섬뜩하다. 호랑이에 씐 사람의 이미지와 밀림에서 방금 꺼내온 듯한 가면이 섬뜩하고, 무고한 사람을 호랑이에 씌었다며 집단으로 트랜스(trance, 정상적인 의식이 아닌 상태. 최면 상태나 히스테리 상태에서 나타나는 무아지경) 상태에 빠져 폭행, 살인하는 애니메이션이 무시무시하다. 사실만을 나열한듯한 앞의 작품과는 달리 이 작품은 미신과 민담, 작가의 시각과 해석이 들어가 있다.
(...) 어떤 학자들은 타나 룬축(Tanah Runcuk)을 과거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는 식민주의자를 위한 전래동화쯤으로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타나 룬축이 1883년 크라카타우 화산 대폭발 당시 묻혀 사라졌다고 믿었다. 또 어떤 이들은 타나 룬축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대한 마술적인 혹은 공상과학적인 열광이라는 해석까지 내놓았다. (...) 최근 4년간 타나 룬축 연구센터에서는 루드비히 슈테른의 민족지리학으로부터 파생된 지속가능한 연구 프로젝트 시리즈를 추진해왔다. <호랑이의 죽음과 다른 빈자리>는 람폭 실루만 마찬 의식에 관한 타나 룬축 연구센터(CTRS) 프로젝트의 연구결과를 미술작품의 형태로 발표한 것이다. (...)
나는 타나 룬축을 구글링했다. 결과는 이 글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당연히,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 작가는 앞의 작가보다 한 수 더 나아갔다. 타나 룬축을 사실일지 아닐지 논란에 휩싸인 어떤 것으로 만듦으로써 ‘정말 그런 이야기 혹은 미신, 그런 연구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한 것이다. 작품 설명 마지막에는 한술 더 떠 이렇게 쓰여 있다.
이 프로젝트는 결론을 내리거나 단일한 해석을 내놓는 대신, 대화를 열고 ‘역사’의 체제 하에서 기록되지 못한 기억들의 세밀한 면면에 접근하기 위한 대안적 창구를 마련하고자 한다.
배경지식이 없는 관람객이 보기에는 역사가 되지 못한 역사(실존하는 이야기)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관람 당시 설명을 보고도 이해가 안 간 나머지 ‘그래서 대체 타나 룬축이 뭔가요?’라고 큐레이터에게 질문까지 했다. 나는 작가가 정교하게 만들어놓은 길을 그대로 따라가, 증거로 제시된 다양한 작업물과 설명에 그대로 속아 넘어간 것이다. 이를 깨달았을 때, 역시나 어떤 알 수 없는 즐거움과 희열이 끌어 올랐다.
멕시코 인류학박물관이 실제로 무너지지 않았어도 여기서 작품을 보는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호랑이 영령에 관한 미신은 작가가 만든 이야기이든, 실제로 존재하든 미신으로써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다. 미신이라는 것은 원래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렇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일반적으로 미술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품의 서사 유형은 다음과 같다.
1. 픽션 (허구)
2. 픽션이 덧대진 논픽션 (사실에 허구를 덧댄 것)
3. 논픽션인 척하는 픽션 (현실인 척하는 허구)
4. 논픽션 (사실)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작품 유형은 다섯 번째로, 논픽션의 형식을 따른 픽션, ‘논픽션의 문법으로 말하는 픽션’이다. 이는 세 번째 ‘논픽션인 척하는 픽션’과 어떻게 다를까. 같은 전시인 [미래과거를 위한 일]에서 로베르토 하코비, 에두아르도 코스타, 라올 에스카리의 <커뮤니케이션 매체 예술/선언문>으로 예를 들어보자(이 작품은 이미지 없이 선언문, 즉 글로만 전시되어 있다). 이 작품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은 해프닝에 대한 보도자료와 사진을 사실인 척 언론사에 전송한다. 작품 설명 글은 ‘실재라고 믿고 있지만 실재하지 않는 현실의 차원을 구축하는 관객의 수용’을 창작했다고 한다. 여기 쓰여있듯 관람객은 ‘미디어를 신뢰하고 보는 것을 믿을지, 보도되는 작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지’ 고민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이 실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은 (인터넷에서 매일 조작된 사진을 발견하고 포토샵으로 간단하게 현실을 속이는) 현대인에게 더 이상 특별한 생각이 아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1966년에 발표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연출됐던 그토록 많은 사진이 그 순수하지 못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증거가 되어버렸다. 대부분의 역사적 증거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이후, 2007년
수전 손택이 쓴 <타인의 고통>에서 현장 사진, 전쟁 사진이 어떻게 연출되었고 그럼에도 사실이라고 믿어져 왔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미술관에서 사진은 많은 경우 증거로서 제시되며 그 경우 네 번째 논픽션 유형에 포함될 것이다. 사진은 우리에게 논픽션의 증거로도, 픽션으로도 비친다. 따라서 작가가 사진을 어떤 문법, 형식으로 제시하는지가 중요하다.
다시 앞서 말한 두 작품(논픽션의 문법을 한 픽션, 이어진 글에서는 ‘가짜 논픽션’이라고 칭하겠다)과 이 작품(커뮤니케이션…)을 비교해보자면 차이점을 두 가지 꼽을 수 있다.
첫째, 이 작품은 픽션이라고 인식되어온, 픽션의 가능성을 가진 매체인 사진(과 설명글)이라는 하나의 퍼포먼스로 '단일하게' 우리에게 전달된다. 단일한 매체, 단일한 방식으로 제시된 작품이 스스로 논픽션임을 주장하더라도 관람객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가짜 증거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픽션일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품고 작품을 보게 된다. 하지만 논픽션의 문법으로 말하는 픽션은 다르다. 증거를 제시하는 아카이브의 형태로, 실제 있었던 어떤 사건을 사실적으로 담은 다큐멘터리로, 사실 그 자체로 보인다. 따라서 만약 관람객이 작품을 의심하더라도, 증거물처럼 제시된 가짜 논픽션을 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이게 진짜야?’라는 물음과 세 번째 유형인 논픽션인 척하는 픽션 작품을 보며 생각하는 ‘진짜 같다’, ‘속을 만 하다’라는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다.
가짜 논픽션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이 ‘이게 진짜야?’라는 의심을 ‘분명히 거짓이다!’라고 단박에 결론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곳에 서서 진지하게 작품을 관람하는 모두가, 일요일 아침 서프라이즈에서 나올법한 가짜 이야기가 미술관에 전시되어있다고는 예상하지 못할 테니까. 우리는 작품을 보는 순간만큼은 그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게 된다.
둘째, 이 작품의 목적은 관람객을 속이는 게 아니라 ‘당신은 속아왔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이는 (1960년대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미술관에서 흔하게 반복되는 ‘능동적인 행위자(actor)와 수동적인 구경꾼’, ‘아는 창작자와 모르는 향유자’의 연장이다. 이는 랑시에르가 말하듯 대중의 역능을 믿지 못한 비판이며, 숨겨질 것 없이 적나라한 현실을 기만이라고 우기는 비판이다.
“그[랑시에르]가 보기에 문제는 감성적인 것의 분배인데도 대중은 가상에 현혹당했을 뿐이라고, 억척스럽게 당(party)은, 마르크스주의자는, 좌파 지식인들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꾸준히 믿는다.”
— 서동진, 반(anti)-비(in)-미학(aesthetics): 랑시에르의 미학주의적 기획의 한계, 망원사회과학연구실, 월간평론 N.1, 2017, 2쪽
그렇다면 우리를 속이는 가짜 논픽션, 논픽션의 문법을 한 픽션 작품의 목적은 무엇일까? 허구라는 걸 알면서 보는 것과 사실이라고 알면서(믿으면서) 보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허구라고 밝혀졌을 때 우리의 태도는 어떻게 달라질까? 도대체 작가는 무엇을 의도한 걸까?
우리가 보는 논픽션, 기록된 역사가 모두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은 현대인에게 당연한 생각이지만, 우리는 그걸 ‘진짜’ 알고 있는 걸까? 은연중에 믿고 싶은 걸 선택해서 믿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 사실이 우리에게 중요할까? 매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자신감(혹은 자만심)에 차 있는 현대 문명인인 나를 미신을 믿는 근대 이전의 비문명인, 혹은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고 휘둘리는 우매한 대중으로 깨닫게 하는 걸까? 그렇다면 앞서 말한 <커뮤니케이션 매체 예술 / 선언문>등의 매체 비평 작품과 방식만 다른 —1960년대와— 동일한 계몽적 메시지를 전할 뿐이다.
혹은 이런 해석이 있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 스스로 자신이 만들어낸 그 세계가 존재하기를 진정으로 염원했으며, 작품을 보고 사실이라고 생각한 관람객보다도 이것이 사실이기를 / 사실임을 순수하게 믿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오즈의 마법사, 나니아 연대기, 해리 포터 등의 판타지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남몰래했던 상상들, 만들어진 이야기인 줄 알면서도 실제로 그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순수한 믿음과 달콤한 착각에 다시금 빠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아닐까.
‘혹시...’에 대한 상상은 우리를 설레게 한다.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세계,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착각보다 달콤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를 진정으로 순수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어린아이가 갖는 축복이다. 한때 진심으로 믿었으나 이제는 기억할 수 없는 신기하기도, 무시무시하기도 한 이야기들이 가짜 논픽션의 모습으로 나타나 작품을 보고 믿는 순간만큼은 실존하게 된다. 우리는 이 순간을 다시 느끼기를 줄곧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관람객은 이러한 과정—혹시, 만약—에서 생기는 설렘을 작가와 공유하게 된다.
가짜 논픽션 작품들이 흥미로운 이유는 사실이라 생각했던 작품이 만들어진 이야기였다는 예기치 못한 충격에 뒤이은 작가와의 모종의 유대감(작품을 순진하게 믿었던 조금 전의 나와 진심으로 믿고 싶은 작가 사이의 유대감)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실재하지만 현실이 아닌, 현실이 중요하지 않은, 현실을 비집고 들어오는 이야기 혹은 상상의 힘 때문일 것이다. 이는 동화와 소설의 세계에서 가장 고전적인 형식이지만 새로운 형식으로 미술관에 나타나, 우리가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며 지나온 경험을 동일하지만 훨씬 빠르게 진행시킨다.
또 다른 가짜 논픽션 작품으로 데미안 허스트의 <아모탄의 황금보물선>이 있다(현재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이는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맞춰 팔라초 그라씨와 푼타 델라 도가나에서 열린 허스트의 대규모 신작 개인전 <난파선에서 나온 믿을 수 없는 보물들 Treasures from the Wreck of the Unbelievable>과 같이 제작된 다큐멘터리이다. 고대의 조각상들이 바다에 오랜 시간 수장되어 있다는 소문에 데미안 허스트가 자본을 투자하고, 전문가들이 이를 발굴하는 내용이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온갖 시대의 조각들이 진짜 신비한 고대 유물인 양, 인류학과 역사학의 고증 및 발굴 과정을 거친 실물인 양 근거를 제시한다. 아모탄에 관한 고대 전설과 연결시켜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데미안 허스트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우리는 모두 진짜 이야기를 찾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믿게 만드는 것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없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이야기에서 믿음은 틈새에 자리 잡습니다.
이 전시는 마음속의 어떤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믿을 수 없는 장소가 있습니다.
과거에 대한 믿음.
신에 대한 믿음.
고대 신에 대한 믿음.
또는 불신.
믿음은 이상하게 절대 진실이 없습니다.
예술가에게는 정답이 없습니다.
과학에도 정답이 없습니다.
종교에도 정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우리는 일종의 진실을 창조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믿든 믿지 않든, 우리에게는 뭔가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