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mar Bergman, Persona, 1966
1966년, 무려 50년도 전에 나온 흑백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영화 소개의 “아마도 이 장면은 전 세계의 영화이론 서적에 가장 많이 인용된 순간 중 하나일 것이다.”라는 첫 문장을 읽는 순간이었다. 어떤 점 때문에 그렇게 많은 전문가에게 인용된 걸까?
이번 상영은 아트하우스 모모 개관 10주년 영화제였기 때문에 영화가 끝난 후에 정성일 감독/평론가의 GV(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다. 나는 시간이 늦어 한 시간 정도 듣다가 중간에 빠져나왔지만 GV는 굉장히 재밌었고 많은 부분 공감·수긍이 갔다. 더불어 인터넷 검색으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배경지식을 빠르고 재밌게 얻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페르소나를 보며 받은 나의 인상들과 GV에서 들은 몇몇 이야기들을 덧붙여 나열해보겠다.
- 출처를 위해 GV에서 들은 내용에는 * 표시를 해놓았다
- 글에 앞서, 영화 소개와 해석까지 씨네 21 홈페이지에서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줄거리: 유명 연극배우인 엘리자벳은 연극 ‘엘렉트라’를 공연하던 중 갑자기 말을 잃게 되고, 신경쇠약으로 병원을 거쳐 요양을 떠나게 된다. 그녀의 요양에 동행한 간호사 알마는 엘리자벳에 대해 간호사로서의 친절과 인간적인 호감, 동경 등을 느끼지만 말이 없는 엘리자벳에게 자기를 털어놓는 과정에서 그녀가 자신을 구경거리로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격적인 비난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엘리자벳의 남편의 방문을 계기로 알마는 마치 엘리자벳이 된 듯 그녀의 인격으로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이상한 체험을 한다. 자신으로 돌아온 후에도 알마는 점차 엘리자벳과 닮아가다가, 마침내 두 인격이 겹쳐지는 듯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갈수록 모호해지고, 두 여인은 가면과 실체 사이의 자기 자신의 죄의식을 고통스럽게 들여다보게 된다.
영화의 시작부터 5분 40초까지는 순전히 이 부분 때문에 영화를 봤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강렬하고 충격적이다. 번쩍거리는 플래시 프레임과 '폭력적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는 점프컷*'들. 맥락 없는 (혹은 맥락이 의도적으로 제거된) 영상들의 몽타주가 번개처럼 이어진다.
그 부분을 묘사해보자면:
불타는 필름, 남자 성기, 세수하는 듯하다가 가슴을 만지는 (어린이를 위한 것 같아 보이지만 선정적인) 뒤집어진 애니메이션, 1920-3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 풍의 침대 위로 뛰어드는 남자(이 이미지는 감독의 이전 영화에서도 종종 이용됐다*), 라이트 박스 위에 올려진 듯한 거미(감독에게 거미는 신을 의미한다*), 양을 죽이고 피를 빼는 사람의 손과 희생양인 양의 눈, 장기, 예수처럼 못이 박혀 피 흘리는 손, 고목나무의 껍질이나 언덕 같은 노인의 하관 클로즈업. 사진처럼 정지된 노인의 얼굴. 손. 발. 그리고 시체처럼 누워있다 일어나는 소년.
이 소년이 흘러가는 5'40"의 중심인물이다. 아름다운 소년의 얼굴과는 달리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리며 관객은 초조한 느낌을 받게 된다. 배경음은 계속해서 의미심장하게 들리고, 소년은 안경을 끼고 화면—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며 손으로 만진다. 카메라가 전환되고 소년이 만지는 건 상영되고 있는 듯한 여자의 얼굴. 플래시 프레임으로 등장하는 불타는 사람. 그리고 영화는 시작된다.
베리만(감독)은 이 영화를 영화에 대한 영화라고 말했고,
‘페르소나’라는 제목이 정해지기 전에 이 영화의 워킹 타이틀은 ‘Kinematografi(시네마토그래피)’였다. 즉 베리만은 이 영화가 무엇보다도 ‘영화’에 대한 영화이고 ‘영화인’에 대한 영화라는 의식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혹자는 그의 당시 건강상태를 들어 이 제목은 그의 유언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 씨네21 페르소나 해설 중
앞의 5'40"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영화 전체의 해석이 바뀔 수 있다*.
그는 5'40"를 자신의 영화 인생에 대한 압축본으로 생각했을 수도, 뒤에 나오는 두 여인의 이야기가 모두 이 소년의 꿈이라는 걸 암시하는 걸 수도, '네가 앞으로 볼 장면들은 영화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낯설게 하기 장치일 수도, 그저 이야기로 들어가는 서문일 수도 있다. 영화에 대한 여러 질문이 쏟아지자 베리만은 "그건 그냥 아름다운 겁니다. 그저 슬픈 겁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어떤 대답을 감독 스스로 명확히 하지 않았다는 점, 누구도 도저히 명확히 할 수 없다는 점, 아무리 분석하고 해석하려 해도 여전히 어딘가 허전하게 느껴진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바로 철저한 무언으로서의 이미지. 이런 상징을 쓰고 저런 은유를 통해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석해도 확신할 수 없고 결국은 무언으로 마주하게 되는 이미지. 이를 통해 <페르소나>는 예술이 된다.
페르소나는 (연극을 잘 알지 못하는 내가 보기에도) 너무나 연극적이다. 무대처럼 꾸며진 세트장, 배우들의 움직임, 빛의 활용 등이 모두 연극을 영화로 옮겨놓은 듯하다. 대부분의 장면들은 실내에서 촬영되었고(실내극 스타일은 베리만의 특징이다*) 야외 장면도 대부분 집 주변 마당과 집 앞 해변이다. 재밌는 점은 마당과 해변 등 야외 씬 조차도 매우 연극적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 장면들이 이차원 평면을 기반으로 설정되어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야외 배경은 무대 뒷벽에 그려진 그림 같고 인물 주변의 입체 물은 무대 위 배치된 소품 같다.
GV에서 듣기로 1960년대는 모든 감독들이 ‘연극에서 해방된 영화’에 매진하던 때라고 한다*. 그런 시기에 이렇게나 연극적인 영화라니, 2018년의 내가 보는 시선과 그때 다른 감독/평론가들이 보는 시선은 매우 달랐을 것이다. 스펙터클과 CG의 정점을 매 초 갈아치우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가 주를 이루고 어린이 애니메이션마저 3D로 제작되는 시점의 관객으로서, 페르소나의 연극적인 화면은 진부하거나 고리타분하기보다는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다시 발견되는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알마가 엘리자벳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 모성애의 부재를 말하는 장면이 두 번 반복해서(한 번은 엘리자벳의 얼굴을, 다른 한 번은 알마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나온다. 똑같은 장면이 바로 뒤이어지는 이 해괴한 편집 때문에 순간적으로 장면의 현실감이 떨어진다. GV에서도 이 장면을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가는, 방금 전까지 꿈꾸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했는데, 정말 눈 뜨고 꿈꾸는 느낌이었다. 또 이렇게도 생각되었다. 알마와 엘리자벳의 내면이 너무나 동일해진 나머지, 그녀가 어떤 말을 할지 말을 하기 전부터 느끼고 있는 상태라고.
또 영화는 이렇게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얼굴의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그녀의 심정을 느껴보라고. 관객 자신이 직접 그 말을 듣는 엘리자벳 보글러가 되어보라고. 관객은 엘리자벳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동안 그녀에게 너무 이입된 나머지 뒤이어 반복되는 (알마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는) 장면에 이르러선 마치 관객 스스로 엘리자벳이 되어 알마를 대면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장면이 끝나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방금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인데, 엘리자벳의 꿈인지, 알마의 꿈인지, 나의 꿈인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엘리자벳은 진심으로 그러해. 나는 알 수 있어.'
영화에서 주인공인 엘리자벳 보글러는 불타는 사람과 학살 장면이 나오는 TV를 보고 그 폭력적인 장면들에 충격을 받아 입을 막고 굳어버린다. 그리고 그녀의 영혼은 상처받지만 이 장면을 도저히 보지 않을 수 없다는 듯 아주 크게 뜬 눈으로 TV를 응시한다. GV에서 알게 되었는데, 이 장면은 감독의 경험을 재현한 것이다. 감독은 엘리자벳처럼 태국 승려의 분신 장면을 보게 되고, 말 그대로 '말문이 막혀버렸다'. 원래 페르소나는 코미디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었으나(!) 이 충격적인 경험 뒤로 감독은 엘리자벳 보글러의 대사를 모두 지워버린다. 그는 '말문이 막힌 것'을 영화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감독의 이런 탁월한 선택 덕분에 엘리자벳 보글러의 내면은 어떻게도 명확하게 정의 내려질 수 없다. 딱 한번, 그녀가 박사에게 쓴 편지를 제외하고(편지에서 그녀가 '알마와의 한적한 전원생활을 행복해하며, 그녀를 관찰하는걸 즐거워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영화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두 '그녀는 이렇게 생각할 거야' 하는 주변 인물들의 추측을 기반으로 한다. 물론 그 추측들이 맞다는 것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제하고 있지만, 그리고 그 추측을 기반으로 앞의 5'40"에서 나온 소년이 그녀의 사랑받지 못한 자식이라는 등의 해석이 나오지만, 영화 내에서 엘리자벳은 끝까지 그 생각들이 맞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스스로 무언의 이미지가 된다.
“사람의 얼굴은 영화의 위대한 소재이다. 모든 것이 다 그 안에 담겨있다”
- 잉마르 베리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다정하게도, 무정하게도, 음산하고 무섭게도, 어떤 음모를 가진 것처럼도, 욕망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녀는 영화 내에서 다른 인물들에게(영화 밖의 관객에게 이 영화가 그런 것처럼) 끝없이 해석하고 싶은 존재이고 어떻게든 해석되지만 절대 알맞게 해석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이다. 단 한번 둘의 싸움 끝에 흥분한 알마가 끓는 물을 부으려고 할 때만 엘리자벳의 말하지 않겠다는 결심히 깨진다. 그녀는 얼굴, 주변 인물을 그녀에게 끌어들이고, 분석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그녀를 분석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내모는 그 얼굴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이미지를 감상하는 동안 어떤 해석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게 싫다. 그럼에도 페르소나를 보는 내내 영화의 장면과 의미들을 해석하고 싶은 충동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그런데 좋은 영화는 항상 그렇다. 그것들은 (정답을 알 수 없지만) 너무나 풀고 싶은 매력적인 퍼즐처럼 느껴진다. 페르소나와 엘리자벳을 이해해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한 편, 이를 이해 가능한 이야기/이미지가 아닌 그저 이미지 자체로서의 이미지, 해석될 수 없는 이미지로 유예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를 더욱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