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에 반대한다
손택은 예술작품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작품의 내용이 작품 자체라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예술작품에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믿음 자체가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해석은 절대적 평가가 아니고 시대적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하나의 '번역' 작업이며, 단지 예술작품을 해석하기 위해 접근하는 습관일 뿐이다.
해석은 과학적 계몽주의의 '사실주의적' 세계관이 신화가 지녔던 권능과 신화에 나타난 믿음을 깨부숴버린 고대의 후기 고전주의 문화에서 처음 나타난다. 신화 이후 시대의 의식에 이 의문이 들어서자, 더 이상 옛 형식 그대로 텍스트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됐다. 그러자 옛 텍스트를 현대적 요구에 일치시키기 위해 해석이 필요하게 됐다. … 해석은 텍스트에 담긴 명백한 의미와 (후세) 독자의 요구가 어긋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해석은 이 어긋남을 해결하려고 한다. … 해석자는 직접 손을 대서 지우거나 고쳐 쓰지 않으면서, 텍스트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해석한다. 비유로 말하자면, 우리는 물체를 잘 보기 위해서 안경을 쓰고 안경을 통해서 물체를 본다. 그러나 물체는 안경에 의해 왜곡되고 변형된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의 입맛에 따라 그때그때 안경을 바꿔 낄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관찰 가능한 모든 현상을 현시 내용이라 했다. 그에게 현시 내용(물체)은 잠재 내용(안경을 통해 바라본 물체)으로 바꿔 해석된다. 그러나 손택은 이 안경이 우리가 물체를 더욱 정확하게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비평가)의 입맛에 맞는 관점으로 바꿀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비평에서 탈주하기 위한 현대 예술의 노력은 추상 미술, 팝아트, 비-예술이라는 장르로 나타난다.
해석하는 사람들이 뱉어놓은 말들은 우리의 감성에 해독을 끼친다. … 아니, 그 이상이다.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해석한다는 것은 의미라는 그림자 세계를 세우기 위해 세계를 무력화시키고 고갈시키는 짓이다. 이는 세계를 '이' 세계로 번역하는 것이다. (이 세계라니! 다른 세계가 있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 해석은 예술을 다루기 쉽고 안락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예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예술)를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책에서 투명성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투명성은 오늘날의 예술—그리고 비평—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의미심장한 가치다. 투명성이란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내용을 쳐내서 조금이라도 실체를 보는 것이다.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다.
스타일이란 무엇인가
스타일을 논할 때 비평가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은유에 기대어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타일을 물질적인 장식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스타일은 많고 적음(양), 짙고 옅음(농도)의 문제가 아니다. 스타일은 외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내부 문제이다.
스타일이 더 복잡하게 스타일화 된 작품, 그러니까, 일상 언어의 어법이나 운율과 동떨어진 산문 같은 것이라고 해서 그 작품이 ‘더 많은’ 스타일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의 겉 모양새가 사실상 우리의 존재 방식이다. 가면이 곧 얼굴인 것이다.
작가가 주제와 형식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구분하려 드는 순간, 특정한 가치나 형식을 위해 작품을 희생시킬 때 스타일을 잘못 다루게 된다.
‘스타일화’는 예술가가 작품 속에서 내용과 표현 방식, 주제와 형식을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굳이 구분하려 드는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난다. 스타일과 주제가 너무 제각각 두드러진 나머지 서로 반목할 때 주제가 특정 스타일로 다뤄졌다고 (혹은 잘못 다뤄졌다고) 말할 수 있다. 창조적으로 잘못 다룰 것, 오히려 이것이 규칙이라 하겠다.
내용이란 무엇인가? 스타일(혹은 형식) 대 내용이라는 이분법을 초월하고 나면 내용이라는 개념에는 무엇이 남는가? 우리는 예술을 어떤 문제에 대한 답, 진술문 정도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내용과 스타일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 힘든 이유는 ‘예술 외적인 요소, 이름하여 진리와 도덕성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방어하고 옹호’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걸러낸 현실에서 어떤 가치를 얻어내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보면서 내용과 형식을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만큼이나 도덕성과 미적 유희 가운데 하나를 택할 필요가 없다. 내용과 형식, 예술과 도덕은 작품에서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다. 스타일과 마찬가지로, 도덕 역시 예술을 특정 가치를 옹호하는 진술문으로 축소할 때, 특정 가치가 도덕의 전부가 될 때에만 심미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이 확연히 분리된다.
이러한 주장을 근거로 했을 때 작가와 독자의 의무는 예술작품을 하나의 주장으로, 하나의 가치로 축소시키지 않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어떤 것을 보여주거나 이해시켜주는 것이지, 판단하거나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으로 만난다는 것은 특정한 경험을 얻는 것이지, 어떤 문제의 해답을 듣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무언가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예술은 그 자체로 무언가 이기도 하다. 예술은 세상 속에 있는 어떤 것이지, 세상에 관해 말해주는 텍스트나 논평은 아니다. … 예술작품 고유의 특징은 … 작품 자체에 완전히 사로잡히거나 매혹된 상태에서 우리가 어떤 흥분, 참여, 판단에 연루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분리시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작품을 봐야 할까? 예술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나 도덕이 아니라) 일종의 태도, 의지다. 손택이 말하는 의지란 의식의 한 가지 태도에서 더 나아가 ‘세계를 대하는 주체의 태도’다. 예술작품은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초월하거나 극복하고, 다가가고, 참여하고, 속하고자 하는가이다.
예술작품을 통해서 구현되고 전달되는 복합적인 의지(세계를 대하는 주체의 태도)는 세계를 폐지시키는 동시에, 매우 강렬하고 분화된 방법으로 그 세계를 대면하게 만든다.
예술작품에 열중하게 되면 틀림없이 세계와 분리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 우리가 더 열린 마음, 더 풍요로워진 정신으로 이 세계에 되돌아올 수 있게 해주는 대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