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울타리에 들이고 싶었던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몇 시간 전 내 목을 졸랐다. 나는 어쩌면 그의 민낯이 보이던 그 순간만을 3년 넘도록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가면을 벗겨내야 내 사랑도 끝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모든 게 다 지나가 버린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그 생각이 맞았다. 아름다운 이별 같은 건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비혼, 비출생을 고집하던 나는 다소 늦은 27살에야 첫 연애를 시작했다. 그 긴 시간 나에게 안전함의 감각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또 찾았다. 곁에 그런 사람을 둬 본 적도 없는 주제에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확신했다. 27년 만에 어렵게 찾은 그가 그런 사람인 것 같았다.
나만큼이나 책을 좋아하던 사람. 책의 물성에 대해, 편집에 대해, 만듦새에 대해 함께 떠들어댈 수 있었던 사람. 서로의 창작을, 도전을, 성장을 응원해 주던 사람. 서로의 글을 가장 먼저 읽어주던 사람. 내가 계속 글을 쓰기를 바라던, 꿈을 이루리라 믿어주던 유일한 사람. 내가 걷어찬 이불을 밤새 다시 덮어주던 사람.
아빠와 달리 술 앞에서 이성을 잃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 나와 같은 것을 보고 함께 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 그리고 나처럼, 혼자 울던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 나를, 우리 가족의 상처를 이해해 주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 내가 지나온 감정들을, 지금 지나가고 있던 사람. 그래서 애쓰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 자기 자신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믿음이 뿌리 깊이 박혀 있던 사람. 나를 만나는 동안 단 한 번의 폭력성도 내비친 적 없이, 스스로 잘 감추던 사람. 무엇이 진실이었는지 이제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어쩌면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부모님은 매 순간 싸우고 있었다.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서는 함께 싸워야 했다. 나와 엄마, 나와 아빠, 엄마와 아빠. 이 세 개의 관계에서 그저 평온한 순간은 존재한 적도 없었다. 평생을 징글징글한 사랑만 봐온 터라 그런 사랑만 사랑인 줄로 착각했다. 그와 나도 어쩌면 진작 헤어져야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니, 우리 관계도 우리 가족의 관계와 같이 징그럽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이유로든 싸웠고, 그게 사랑인 줄로 나는 당연히 착각했다.
그는 자주 끝을 말했지만 나는 매번 그를 붙잡았다. 그럴 때면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내 곁을 지켰다. 갈등 상황에서 그는 항상 입을 다무는 사람이었다. 나의 감정과 상황을 살피기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중심에 두고 우리 관계를 판단했다. 그렇게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는 늘 이별을 통보했다. 그는 이별을 말하는 방법으로만 속내를 내비쳤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를 어떻게든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래서 내가 이별을 통보받을 때야 우리는 깊이 있고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어느새 끝이라는 단어가 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보름 전, 그가 몇 번째인지도 모를 이별을 고하던 순간 나는 우리가 진정 끝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나를 만나는 게 불행하다고 했다. 그제야 이미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진 내가 보였다. 그 모습이 우리의 끝을 말해주었다.
나는 정말로 그와 헤어지려고 노력하다가도 한순간 무너지기를 반복했고, 그의 집에 찾아가 우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는 그럴 때마다 별말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며칠에 한 번씩 만나던 게 일주일에 한 번 주기로 길어졌다. 우리는 그렇게 느슨한 만남을 이어갔다. 이 이야기를 하면 친구들은 백이면 백 아직 헤어지지 않은 거 아니냐며, 그러다 다시 만나겠다는 말만을 했다. 점점 솔깃했다. 당장 그를 만나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흔들어놓고 싶었다.
그의 집을 찾아가 벨을 눌렀다. 그가 나왔다. 손님이 있다고 했다. 그는 누굴 집에 들이는 법이 없었으니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여자가 있으니 자기 인생을 방해하지 말라 했다. 나는 준 적 없던 것들을 단 몆 주 만난 그 여자가 넘치도록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나와는 달리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라고. 진지한 관계라고 덧붙였다. 그가 당장 꺼지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여자의 얼굴을 봐야만 모든 게 끝날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게 새로운 존재에 대해 조금도 언질을 주지 않았다. 새로운 사랑을 만나면 나에게도 알려주겠다던, 우리만의 약속도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이라고, 내가 먹고 싶어 하던 케이크도 미리 사서 챙겨주었다. 단 하루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피부로 와닿을 리 없었다.
나를 건물 밖으로 끌어낸 그에게 등을 돌려 걷다가, 다시 달려가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그 여자를 직접 봐야겠다고 소리를 지르는 나를 바닥에 쓰러뜨린 채 그가 내 숨통을 조였다. 숨이 턱 막혔다. 고작 몇 주를 만난 여자와의 관계를 지키겠다고 3년 넘게 만난 나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저항했다.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의 행동을 내가 재현하고 있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한때 사랑하던 존재에 맞섰다. 그냥 좀 져주지, 그냥 좀 무시하지. 그게 쉬운 일일 거라 오만하게 생각했고 엄마를 멋대로 판단했었다. 그의 손을 뿌리치고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갔을 때 그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아빠의 상간녀를 만나는 상상을 자주 했다. 그 여자도 저 여자처럼 말을 하고 움직이는 사람이었겠지. 내가 만나고 싶었던 건 둘 중 누구였나 이제야 헷갈리기 시작한다. 어쨌든 수많은 상상으로 다져진 나는 별 어려움 없이 한 여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상했다. 그 여자에게는 분노가 일지 않았다. 그저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3년이 넘도록 마주하지 못한 그의 민낯을, 온 마음을 내어주기 전에 마주할 수 있었던 게 행운이라고. 그러니 그에게서 도망치라고. 그런데 내가 목숨을 걸면서까지 말하고 싶었던 게 정말 그게 맞나. 그 또한 나의 위선은 아닐까? 이제 와 고백하자면 나는 사실 그녀의 행복보다 그의 불행을 더 바라기는 했다.
몸싸움 중에 부딪힌 관자놀이에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어지러웠다. 나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계속해서 떠들었다. 미쳤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미치지 않고는 살아낼 수 없었으니, 미쳐야 한다면 미쳐서라도 살아내는 방식을 나는 곧잘 선택했다.
경찰이 왔다. 나는 늘 112를 누르는 사람이었는데, 아빠의 자리에 내가 서있었다. 아빠도 매번 이런 심정이었을까. 어쩌면 나는 아빠에게서 도망칠수록 아빠처럼 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번의 신고로는 처벌되지 않지만 다음부터는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알겠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나는 내가 원하던 모든 것을 이미 얻었다. 그의 민낯을 보는 순간 내 사랑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 그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들어가기가 두려워 공원을 계속해서 걸었다. 친구는 그가 무섭다고, 내가 걱정된다고, 당분간 부모님 댁에 가 있으라 했다. 나는 괜찮다고 친구를 안심시켰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까, 내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뛰었다. 친구와의 통화를 마치고도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몇 시간을 홀로 버티던 나는 결국 택시를 불러 부모님 집으로 갔다.
평생을 불안에 떨던 이곳이 지금은 가장 안전하게 느껴진다. 불안이 잦아들었다. 결국 나는 이 익숙한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런데도 달라진 게 있다면 나는 점점 나를, 우리를 이해하고 있다. 이 사납디사나운 애착을. 미친 모습의 사랑을. 그렇게밖에 줄 수 없었던 두 사람이 이제야 보인다. 이 모든 일을 겪은 지금에서야, 나는 그들을 더 이상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부모님의 모습이 내 삶에 겹친다. 어쩌면 그들도 매 순간 나처럼 그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려 안간힘 쓰고 있었을 것이다. 미쳐서라도 살아야 했던 순간들 속, 내가 운 나쁘게 함께였는지도 모른다. 생존을 향한 열망은 언제나 처절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어떤 깨달음은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만 얻을 수 있나 보다.
나는 정말 나의 신념을 뒤엎고 그와 결혼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수술을 했는데 내가 면회조차 갈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랬다. 그가 가장 약한 모습을 보일 때 나는 가장 강한 마음으로 그와 어쩌면 평생을 함께하려 했다. 그렇게 결혼을 원하던 그가, 막상 내 입에서 결혼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나랑 미래를 함께하고 싶지 않아졌다고 털어놓았다. 우리의 미래는 상상할 수 없는 것, 그만이 고통스러운 것, 나만이 행복한 것이 될 거라 했다. 세 달 전 병원에서 그의 가족들을 마주했을 때, 이제 식사라도 한번 같이 하자던 그의 말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났다. 어제 내게 일어난 일들이 실재했던 현실이라는 감각이 선명하다. 머리의 혹이, 목의 통증이, 나를 걱정하는 친구들의 연락이, 그리고 이 글이, 계속해서 나를 현실로 끌어내린다. 내가 목숨을 걸고라도 알고 싶어 했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저 진실을 원했다. 사랑했던 사람들을 기만하지 않는 떳떳함을 바랐다. 아빠가 그 긴 세월 자신까지 속이며 살아왔듯 그도 끝내 스스로를, 그를 한없이 사랑했던 나를, 그 여자를 속였다. 그 알량한 자존심이 그 두 남자에게는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목숨보다도 지키고 싶은 것이었을까.
나는 이제 본능을 좀 거스르고 싶어졌다. 뼛속 깊이 박혀버린 그들의 흔적을 하나하나 발라내고 싶다. 우선 엄마에게 모든 이야기를 해야겠다. 엄마처럼 나도, 징글징글한 사랑을 했다고. 이제야 엄마를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엄마 편에 섰던 순간들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다고. 그로 인해 평생을 따라다닌 아빠의 원망도 나는 다 견뎌냈다고. 그럼에도 엄마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고. 그러니 이제 제발 내 편에 서 달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