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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Sep 20. 2020

엄마가 강요받은 침묵

엄마가 점점 말하기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소리가 나지 않아 대화가 어렵다보니 모든 사람이 답답해하고 이제는 대화 시도자체를 하지 않게 된다. 몸짓이나 표정, 입모양을 보고 원하는 것을 알아내서 해드리는 형편이다. 엄마가 원하는 것이야 몇 개 안되니 대충은 다 알아듣는다. 말로 안되는 경우 소도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엄마의 소도구는 효자손이다. 우리를 부를 때는 효자손으로 침대의 난간을 댕댕댕 두드린다. 불러서 가장 많이 하는 말씀이 '화장실가고 싶어'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오줌'아니면 '똥'이다. 세번째는 '물 다오'이다. 이 세가지가 대부분이고 그 나머지는 빈도가 아주 낮다. '배고파' '나가자''손톱 깎아줘''다른 옷 줘' 정도이다. 요즘 새로 등장한 말은 '마스크'이다. 밖에 나가자고 하면 대뜸 마스크부터 찾는다. 준법정신 투철한 엄마다.

가장 어려울 때가 뜬금 없는 질문을 알아채야하는 경우다. 엄마는 갑자기 어떤 일이 생각나서 말을 꺼내시는데 도저히 짐작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몇 일 전 엄마가 급하게 나를 불러 앉히더니 뭐라고 뭐라고 말을 하는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 답답했고 나중에는 짜증까지 나서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려했는데 엄마는 포기하지 않고 또 불러서 뭐라 뭐라 하신다. 보통 때는 거의 주어, 동사 조합의 단문인데 이번에는 문장이 짧은 것도 아니고 길게 이야기를 하신다. 연필과 종이를 져다가 쓰시라고 했더니 글은 거의 지렁이가 기어가다 구덩이에 다 쳐박혀서 뭉쳐있는 꼴이다. 온 식구가 동원되어 해석에 골몰했지만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녁을 먹고 다시 차분히 엄마 앞에 앉아 뭔 얘기인지 해보라고 했다. 엄마의 얼굴옆에 귀를 대고 계속 듣다가 한 단어를 알아들었다. '재희' 였다. 사촌언니 이름이다. '응 엄마 재희언니 뭐?' 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또 한마디 '추석' 을 알아챘다. '아~~재희언니 추석에 시골가냐고?' 하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보고 싶은 모양이다. '언니한테 전화해보고 추석에 시골 안가면 놀러 오라고 할께' 라고 하니 표정이 좋다. 내친김에 더 이야기를 하신다. 허리가 아프도록 구부리고 또 귀를 기울였다. '돈, 돈' 하신다. '뭔 돈?' '재학이, 재학이'를 겨우 알아들었다. 시골있는 사촌오빠 이름이다. '아~~~재학이 오빠에게 아버지 산소 벌초해달라고 하고 돈 보내주라고?'하니 맞다고 하신다. 역시 나는 엄마구전문학 해독의 천재다.

엄마와의 의사소통을 위해 핸드폰 자판을 이용해봤다. 엄마에게 스마트폰을 주고 자판을 눌러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했다. 시험적으로 내 이름을 눌러보라고 했다. '엄마 이응, 아, 니은 눌러봐.' 엄마는 돋보기를 끼고 자판을 조심스럽게 누른다. 화면에는 ㅇㅇㅇㅇㅇㅇㅇㅇ이 찍힌다. '아니 엄마 손가락을 꾹 누르면 안되고 톡 하고 눌러.' 다시 시도한다. 역시 ㅇㅇㅇㅇㅇㅇ이다. 스마트폰은 탈락이다. 다음은 종이에 자음모음을 그려서 오렸다. 침대바닥에 조각을 늘어놓고 하나씩 집어서 글자를 만들라고 했다. 몇 분동안을 이리저리 조각들을 휘적거리시다가 하나를 찾아서 놓는다. 나는 잘 하셨다고 박수를 쳐줬다. 겨우 ㅇ+ㅏ+ㄴ을 맞췄다. 그런데 다음 조각을 찾아 놓다가 만들어 놓은 글자가 흩어졌다. 다시 찾아서 놓고, 또 한 글자 만들고 흩어지고, 조각 더미에서 자음 모음을 찾는 엄마 손은 바쁘다가 나중에는 포기하고 마구 휘젓고 계신다. 이것도 실패다.

인터넷을 뒤져 자석이 붙은 유아용 한글 글자판을 주문했다. 그런데 물품을 받고 보니 자석을 붙이는 밑판은 없고 달랑 글자판만 왔다. 철제로 된 판이 필요하다. 철로 된 독서대를 가져다놓고 엄마에게 글자를 찾아 붙이라고 해봤다. 붙여놓은 글자가 흩어지지 않으니 느긋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시간이 얼마를 지났을까, 드디어 엄마는 내가 주문한 글자를 완성했다. 나는 눈물이 나려고 했다. 꼭 안고 잘 하셨다고 등을 두드려드렸다. 똥, 오줌, 밥 글자를 해보시라고 했다. 이제는 엄마가 아주 답답해 할 때 세상을 향해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영화 '위대한 침묵'에는 알프스 계곡에 위치한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수도사들의 침묵의 일상이 다큐멘터리로 소개된다. 그곳에서 수도사들은 의사소통을 위해서 하루에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는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발자국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바람소리, 미사 때의 독경소리, 고양이에게 밥 주며 주절거리는 몇 마디 뿐이다. 그 영화의 주제는 '언어가 사라진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보기 시작한다.'라는 것이다. 말이 끊어진 곳에서 그들은 신의 소리를 듣고 자연의 위대함을 본다. 책장을 넘기며 삶의 이치를 깨닫고 동료의 몸짓에서 마음을 읽는다.

엄마의 말이 끊어진 지점에서 나는 이제 새롭게 출발한다. 엄마를 알아가기 위해. 비록 하루하루 현실의 어려움에서 짜증도 내고 심할 때는 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마가 강요받은 침묵에서 나는 삶의 위대함을 느낀다. 살아가는 이 모든 순간들은 그 자체로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침묵이든, 욕이든, 좌절이든,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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