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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May 01. 2024

머리카락을 자르며

머리카락이 뭔 죄가 있겠나마는, 미용실로 갔다. 2년여를 기르던 머리카락을 잘랐다. 마음이 산란하여 자꾸 잊어버리고 생각 집중이 안 되니 뭐라도 속죄양을 찾아야 했다.


한 달 동안 지내온 일정을 살펴보았다. 달력에 한 칸도 빈자리가 없이 빼곡하다. 여행을 다녀오고 경조사를 참여하고 강의를 했다. 독서토론을 하고 글쓰기 모임에 나갔다. 매일 운동을 해야 한다니 빠짐없이 수영장을 갔고 친구를 만났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면 다음 날 일정을 챙겨야 했다. 은퇴하면 시간 부자가 될 줄 알았었는데. 언제부터였을까? 끊임없이 달력에 일정을 메모하고 몸치장을 하고 밖으로 나간 것이.


나의 은퇴계획은 그냥 쉬는 것이었다. 읽고 생각하고 쓰는 생활을 꿈꾸었다. 엄마의 간병으로 늘 집에 머물러야 하니 다른 계획은 가지지 않았다. 그 시간이 좋았다. 내가 계획한 시간표 이외에 변수가 없었느니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남들은 엄마 간병에 힘들겠다고 하였지만 나는 그런 안정된 시간의 흘러감을 즐겼다. 조곤조곤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하고 책을 읽었다. 엄마가 잠든 시간이면 노트북을 열고 일기를 썼다. 만남을 위한 외출도 없고 사진을 찍을 일도 없으니, 옷이나 머리모양을 손질하는데 무신경했다. 늘 관리하기 좋게 짧은 머리모양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 두 달 정도 꼼짝하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 책도 글도 접어두었다. 49재를 지내고 처음 바깥으로 나들이했다. 그로부터 2년. 나는 머리를 기르고 새 옷을 사 입고 사람들을 만났다. 가족과 함께 여행을 하고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고 차를 마셨다. 강사 생활도 시작했다. 매일 강의 준비를 하고 다양한 수강생을 만나 내 안에 있는 것들을 털어냈다. 마치 마음 안에 공허함을 남겨두지 않으려는 듯.


모든 의식이 밖으로 향하니 마음이 내 안에 머무를 틈이 없었다. 점점 무리한 일정이 더해지고 급기야는 한 달 내내 밖으로 내달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글이 써지지 않는다. 글제를 앞에 놓고 앉아있어도 생각이 모이지 않아 한 자도 쓸 수 없다. 책을 읽는다. 독서토론 모임의 일정에 쫓겨 책을 읽으니, 토론 주제 뽑기에 연연한다. 토론하고 와도 마음이 개운치 않다. 미처 여물지도 못한 생각들을 마구 쏟아낸 기분이다. 설익은 밥을 씹는 느낌이랄까. 먹기도 즐겁지 않지만, 속에 들어가 탈이 날 것 같다. 책도 내려놓는다.


이사를 하고 정리할 시간이 없느니 일주일 내내 물건 찾는 게 일이다. 익숙하게 굴러가던 일상마저 엉망으로 뒤엉킨 기분이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도 어느새 ‘내가 망치와 못을 어디에 뒀었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벌떡 일어서서 서랍장 여기저기를 뒤진다. 벽에 걸지 못한 액자들이 바닥에 놓여있으니 계속 신경이 쓰인다. 결국 창고를 한바탕 뒤져서 도구를 찾고 액자를 걸고, 장롱에 쑤셔 박은 옷들을 또 정리하고 앉아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돈다는 말처럼 움직이던 직장생활에서는 늘 일탈을 꿈꿨다. 똑 같은 일상으로만 이루어진 생활이니 글감도 없다고 했었다.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면 그 경험들이 다 글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이라는 것이 참 묘하다. 한가하면 생각할 거리가 없다고 하고 바쁘면 생각할 틈이 없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 생각을 많이하니 글이 저절로 써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하는데는 책도 방해요소가 된다. 책을 잡기는 쉬우나 글을 쓰기는 어렵다. 그만큼 생각을 하고 또 해서 내 안에서 푹 삭혀야 하니. 생활이 번잡스러우니 밖으로 향하는 의식을 모으기 쉽지 않고, 관조하고 통찰하지 못하니 글이 되어 나오지 않는 것이리라.

 

머리를 감고 드라이기에 말리다가 문득 이 혼란스런 상황이 마치 머리카락 때문인 것처럼 손을 멈춘다. 거울을 보니 산발한 머리가 내 마음과 같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앤공주는 꽉  짜인 일정과 과도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 길에서 발견한 미용실로 무작정 들어가 긴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그리고 하루의 자유를 만끽한다. 옷을 입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미용실로 갔다. 2년 동안 기른 머리카락이 한순간에 잘려 나간다. 샴푸를 하고 거울을 보니 목이 훤하게 드러나 있다. 마치 내 정신을 이리저리 얽어서 끌고 가려던 괴물이 사라진 느낌이다. 미용실을 나서니 앤공주처럼 발걸음이 한없이 가볍다. 시간 여유를 가지고 밥상을 차렸다. 가족이 모여 앉아 함께 밥을 먹었다. 설거지를 하고, 차 한잔을 앞에 놓고 앉았다. 밖으로 향한 마음을 모아들이는 의식을 치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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