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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Apr 24. 2024

더할 수 없는 선물 같은 산

나이테를 만들며

<글제 : 산>

                                                         

젊은 시절 등산의 목적지는 무조건 정상이었다. 중학교 수학여행으로 설악산에 갔다. 천불동 계곡을 처음 가 본 이후, 나에게 가장 멋진 산이 되었다. 비룡폭포, 흔들바위를 거쳐 울산바위가 올려다보이는 곳까지가 종착점이었으니까.


깎아 지른 듯 서 있던 울산바위는 안전을 우려하여 우리에겐 등산이 허용되지 않았다. 우람한 바위산을 우러러보기만 하고 돌아왔다. 언젠간 저곳에 오르고 말리라. 그 꿈은 오랜 시간이 지나 이십 대가 되어 이루어졌고 그때 이후로 설악은 나의 단골 등산코스가 되었다. 한해 서너 번은 다녀와야 직성이 풀렸다. 전문 등산가도 아니고 그저 동네 뒷산이나 오를 체력으로 무리를 해가면서도 굳이 대청봉을 올랐다. 그때는 목적지를 정복하는 것이 왜 그리 중요했는지. 설악산 사계의 변화나 나무들이 전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등산로를 따라 발을 옮기기에 바빴다.


첫아이를 임신하고 결혼 1주년 기념일에 처음으로 권금성 케이블카를 탔다. 등산하며 오를 때는 케이블카 타는 사람들을 코웃음 치며 바라봤었다. 그게 등산이냐며. 무거운 몸으로 케이블카에서 내려 권금성 꼭대기까지 힘겹게 걸어갔다. 올려다본 시월의 설악은 아름다웠다. 높푸른 하늘과 어우러진 단풍의 물결은 정상에서 내려다보던 것과는 또 다른 멋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오르지 못하는 정상으로 열망을 상쇄해 주기에는 부족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등산의 목마름은 여전했고 체력이 저하되는 상태에서도 무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행 중 연골이 찢어지는 사고가 났다. 그 자리에 고통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의사는 산행 중단을 권고했다. 아쉬움이 컸지만, 그때 이후로 높은 산 등산은 어려워졌다.


무릎부상 이후로 내가 오르는 봉우리의 높이는 조금씩 낮아졌다. 높이 오르려 발끝만 내려다보며 걷던 등산로는 하늘과 나무를 올려다보며, 숲속 둘레길로 바뀌었다.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뭇결을 손으로 쓸어보며 세월의 나이테를 짐작했다. 늙어서도 함께 산에 가자던 동무들이 하나, 둘씩 무릎이 말을 듣지 않게 되며, 산행 모임은 자연스레 공원으로 장소를 바꾸었다. 남산 둘레길을 산책하며 관찰하니, 정말 다양한 나무와 식물군이 계절을 바꾸며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광릉숲을 갔을 때는 숲을 공부한 친구가 안내를 자청하고 나섰다. 친구가 소개하는 나무 이름을 한 굽이 돌아가면, 다 잊어버리고 또 묻는다. 숲을 사랑하게 되면 나뭇잎 잎맥 하나하나의 모습을 다 구별할 수 있다는데. 듣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나이에 나무의 참모습을 볼 줄도 모르니 안타까울 뿐이다. 매번 친구에게 묻기도 미안해서 핸드폰 어플을 열고 질문을 보낸다. 신기하게도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 답을 보내주다니.

몇십 년씩 그 자리에 붙박여 자리를 지키는 나무의 인내를 인정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주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 계수나무야~ 가문비나무야~ 너도밤나무냐? 하며 왁자지껄 박자 맞춰 부르고 걸어가노라면 바람결에 나무도 우리를 환영하며 가지를 흔들어 주는 듯. 평일 낮 조용한 숲속을 오붓하게 걷는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친구들과 나무처럼 나이테를 쌓아가면서.


누가 더 높이, 더 많이 오르고 걷는가는 올림픽 경기에서나 다툴 일이 아닌가. 자연을 맞이함에 있어서는 누구라도 자기 마음껏 깊이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니, 경쟁이란 없다.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은 누가 먼저 고지에 도달하는지 경쟁하고 자기가 더 잘났다며, 조금이라도 뻐기고 싶었는지.


이제 그 젊음의 굽이를 돌아 얼굴에 나이의 주름이 훈장처럼 새겨질  때다. 속으로 단단한 나이테를 채우는 나무처럼, 내 삶에 다가온 아름다움을 내면에 차곡차곡 쌓아갈 시간이다.


설악산을 바라보며, 울산바위의 깎아지른 경사를 한 계단씩 앞다투고 오르던 그 투지도 그때는 아름다웠다. 젊음의 뜨거운 불꽃은 사그라졌고 지금은 동네 공원의 풍광에 차분한 눈길을 던진다. 풀잎에 맺히는 아침이슬의 영롱함과 어깨 위에 내려앉는 봄꽃의 화사함은 시선을 낮춘 나이에 주어지는 선물이 아닌가. 생각할수록 더할 수 없는 선물 같은 산이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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