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경숙 Jun 12. 2024

소나기

뒷골 밭 가에 다홍색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소나기를 흠뻑 맞아 무거워진 발을 옮기던 내가 나무에 매달려 감 두 개를 땄다. 누구네 감인지 알 수도 없지만 서리를 한다는 생각도 안 했다. 얼굴에는 눈물과 빗물이 섞인 물줄기가 함빡 젖은 옷 속으로 계속 흘러내렸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불현듯 뒷골로 발길을 돌렸다. 무엇을 하다가 늦어서 혼자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에 가도 아무도 없을 터이니 뒷골로 돌아서 천천히 가고 싶었다. 둔덕을 오르니 밭 너머로 툭 터진 시야에 큰 산이 가득 들어왔다. 경치에 이끌리듯 무작정 걸었다. 큰 산 아래까지 낯선 들판을 가로질러 갔다. 얼마나 걸었는지 다리가 묵직해지기 시작한다. 그제야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였다. 큰 산 너머에서 몰려온 먹구름이 우당탕탕 하는 천둥과 함께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주위는 어두워지고 빗줄기는 더욱 거세게 내리퍼붓기 시작했다. 몸을 피할 지형도 없는 밭둑 한가운데서 얼굴에 세찬 소나기를 맞으며 마구 달렸다. 달리다가 힘이 달려 걸으며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는데, 마치 천지창조의 직전처럼 어두컴컴한 사방엔 오직 빗줄기 소리뿐이었다.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철벅거리는 신발을 신고 무작정 걸었다. 배가 고팠다. 양손에 쥐고 가던 감 하나를 베어 물었다. 색깔만 붉었지, 땡감은 베어 물자마자 온 입안을 떫은맛으로 물들였다. 꼭꼭 씹은 감물을 삼키고 건더기는 뱉어냈다. 눈물과 빗물이 섞여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컴컴하던 하늘이 조금씩 옅은 회색으로 변해가고 눈물은 멈추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주위에 지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뭔지 모를 시원함이 느껴졌는데.


아직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흠뻑 젖은 몸으로 집에 도착했지만. 서운한 마음보다는 지청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오히려 안심도 되었다. 그 후로 소나가 내리는 날이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무도 모르는 비 오는 날에 나만의 비밀이 생겼으니까. 가끔 소나기 속으로 비를 맞으며 뛰어다니곤 했는데, 도시로 온 후로는 남들 눈이 있어 그럴 수 없었다.


중학교 시절, 서울로 전학을 와서 친구가 없었을 때 도서관은 나만의 피난처였다. 어느 날 방과 후 한참 소설책에 빠졌다가 보니, 어느덧 밖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겨 쫓기듯 도서관을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도 없는데.


건물 입구에 서서 한참 기다렸지만, 빗줄기는 더 거세졌다. 일단 가방을 머리에 얹고 교문 쪽으로 뛰었다. 소낙비는 사정없이 쏟아지고 교문 쪽에서는 야간부 학생들이 우산을 쓰고 올라왔다. 창피한 마음에 방향을 틀어 대운동장 쪽으로 들어섰다. 등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야간부 학생들이 모두 등교하고 나면 교문을 나갈 생각이었다. 스탠드를 가리는 등나무 아래 서서 어두운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퍼붓는 빗소리만이 내 주위를 에워쌌지만.


그때 갑자기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운동장으로 내려서서 그냥 쏟아지는 빗속을 걸었다. 운동장 주위에 띄엄띄엄 불이 켜진 황색 가로등이 있었고 인적은 없었다. 불현듯 어린 시절 뒷골 밭 가운데를 걷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교복이 젖고 빗물은 온몸을 타고 옷 속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내리퍼붓는 비에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눈과 코로 흘러내려 벌린 내 입으로 들어오는 빗물이 달착지근했다. 그날, 난 혼자서 비를 삼키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왔다.


집에 거의 도착해 갈 즈음, 주위에 우산을 쓰고 힐끔거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니 퍼뜩 정신이 들었다. 창피한 마음에 집까지 어떻게 갔는지 모른다. 이모가 건네준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닦으며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내 유년 시절의 비밀 한 조각이 되살아난 듯. 마음이 너무 가벼웠다. 뭔가 가슴속에 쌓여있던 떫은 감 같은 응어리를 덩어리째 뱉어낸 느낌이랄까.


소나기 오는 날이 되면 그 시절 추억이 떠오른다. 장사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키워진 외로움과, 사춘기 시절에 부모를 떠나온 마음의 부담이 시원한 소나기의 물줄기로 씻겨 내려간 덕분일까. 가끔 힘들 때면, 조용히 혼자만의 정화의식을 거치며 기운을 회복한다. 빗물인지, 눈물인지도 모르게 온몸으로 흘러내리던 그 소나기가 내 삶의 첫 정화수였으므로

이전 14화 화수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