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 놓아둔 화분의 자주빛 부겐빌레아 꽃을 바라본다. 정확히 말하면 자주빛 꽃처럼 보이는 것은 꽃을 싸고 있는 포이며 그 안에 참깨 알 크기의 꽃술처럼 보이는 작은 꽃망울이 있다. 저 깨알 같은 꽃망울이 언제 터질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들여다본다.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라고 하니 야생의 꽃을 보려면 지구 반대쪽으로 돌아가야 하려나. 방안에서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 황감할 따름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서 선물로 받은 화분이다.
꽃과 나무를 좋아하면 정원이 있는 집을 소망하게 된다. 마당에 잔디를 깔고, 계절마다 옷을 바꿔입는 나무들을 심고 꽃을 가꾼다. 담장 안에 고이 모셔두고 혼자서 오롯이 관찰하는 호사를 누리고 싶은 게다. 말 없는 식물과 집안에서 한 식구처럼 대화를 나누기도 하면서. 정원이 없으면 아파트 베란다에도 화분을 들여놓는다. 온갖 정성을 들여 식물을 키운다.
나 또한 나무와 꽃이 풍성한 풍경을 보는 것을 즐기지만 집안에서 식물을 키우는 것은 쉽지 않다. 더러 선물로 받은 화분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시들해지며 열심히 물을 줘도 말라 죽어 버린다. 더러는 지나친 수분공급으로 뿌리가 썩어 죽기도 한다. 식물의 품종에 따라 환경이 맞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원예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여 물과 통풍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애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봐 주고 정성으로 돌보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장애요인을 다 극복하고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사람이어야 비로소 식물을 가족으로 들일 자격이 주어진다. 애완동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랑으로 돌본 식물은 주인에게 마음의 평안을 준다.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고 물을 주며 애정을 쏟으면 햇빛과 바람도 감응하여 식물을 쑥쑥 자라게 할 터이다. 그런 연후에야 튼실한 가지와 윤기 나는 잎에서 아름다운 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화분을 선물해 준 친구가 예상치 못했던 말을 했다. “이젠 식물을 기르는 것도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어. 산에 들에 핀 것을 보러 가면 되는데 말야.” 원예가 인생 최고의 즐거움이라며 퇴직 후에는 새로운 일을 하거나 사람들 사귀기도 꺼리던 친구인데. 뭐든 오래 몰두하면 철학자가 된다더니 식물 기르기도 다름이 없는 모양이다.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을 즐기려 숲속으로 들어갔던 소로우도 그의 글 『월든』에서 돈 한 푼 안 들이고 농장의 경치를 소유했던 이야기를 한다. ‘시인은 농장의 풍경을 그의 시 운율 속에 옮겨놓고, 젖을 짜고 크림을 전부 가져가고 농부에게는 찌꺼기 우유만을 남겨 놓았다’라고 표현했다. 소로우 자신은 상상 속으로 농장을 소유하며, 손수레를 사용하는 일도 없이 해마다 ’경치의 소득‘을 거두어 왔다며.
내가 사는 동네에는 큰 공원이 있다. ‘88 서울올림픽을 기념하여 설치된 공원으로, 체육시설을 둘러싸고 아주 넓은 부지에 다양한 수목과 꽃, 연못과 토성이 계절마다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 낸다. 비록 나의 집은 손바닥만 한 정원도 없고 식물을 내놓고 키울 베란다도 없지만 나는 사시사철 이 공원에서 ‘경치의 소득’을 마음껏 벌어들이고 있다. 사람들에게 “올림픽공원이 우리 집 정원이야.”라고 소개한다. 집안
에 들여놓고 키우는 식물은 나만을 위한 소중한 선물이겠지만, 공원에서 만나는 나무와 꽃들은 수없이 많은 사람이 무심히 지나간 뒤에 발견하는 보석 같은 존재이다. 그 보석은 어떤 시인이 그곳을 지나가며 운율 속으로 가져갔을지라도 뒤이어 오는 다른 시인에게도 무궁무진하게 풍성한 수확을 안겨 준다. 꺼내도 꺼내도 재물이 나오는 화수분이라고나 할까.
지구 반대편에 피는 꽃을 화분에 담아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호사도 좋지만, 내 눈이 닿는 곳이 다 내 정원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가성비 높은 수확이 아니겠는가. 아름다움의 정수를 빼내는 시인의 눈을 가졌다면 말이다. 오랫동안 정성 들여 식물을 가꾸던 친구는 이미 시인의 눈을 가지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2024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