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로에서 농로로 조금 들어간 골짜기 끝. 밭에는 풀이 제법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비탈 위 산자락을 바라보니, 오월의 짙은 초록으로 아카시아 나무들이 무성하게 잎을 드리우고 있다. 밭고랑 몇 개를 건너 발을 옮기던 내가 마치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초록과 연 황토색이 섞인 몸통의 뱀 한 마리가 고랑 한가운데 또아리를 튼 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었다.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붙박여 버렸다. 기 싸움이라도 하려는 듯 뱀도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버티고 있다. 나는 한발씩 뒤로 물러났다. 밭 입구에 도달하여 뱀과 일정 거리가 유지되자 뒤로 돌아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 산소에 가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허겁지겁 동네 쪽으로 차를 몰았다. 사촌오빠 집에 도착해서 뱀 이야기를 했더니, 지금 나오는 뱀은 독이 없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 않는가.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 묘지 이장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고향이 멀고, 자주 찾아보지도 못하니 가까이 납골당에 모시자고 했다. 엄마는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그 후 묘 이장에 대해 구체적 논의를 하기 전에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을 맞게 되었지만.
일단 엄마를 가까운 납골당에 모신 후 아버지 묘소를 이장하여 합장하기로 한 생각은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그러던 중 영화 ‘파묘’에서 묘 이장 후 동티나는 것을 보고 나서는 두려워 이장을 망설이게 되었다. 사촌오빠의 생각을 넌지시 여쭤봤다. 사촌오빠는 강하게 반대하셨다. 자기가 여력이 있어 산소를 돌볼 수 있고, 자손들이 다 무탈하게 살고 있는데, 괜히 묘를 건드려 동티를 낼 필요가 있냐고.
열아홉 살에 시집온 엄마는 스무 살에 딸 하나를 낳고 여섯 달 만에 신랑과 이별했다. 방랑벽에 술까지 좋아하시던 외할아버지가 오일장 술자리에서 아무 대책 없이 혼사를 맺는 바람에 아버지의 병을 모르고 결혼했단다.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엄마를 여의고 가족을 돌보고 살면서도 미래에 대한 작은 꿈을 갖고 있었을 텐데.
결혼이 불행한 인생의 작은 구원이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부모 복 없는 사람 남편 복 없다.’라는 옛말이 맞는가. 엄마의 결혼 생활에는 작은 행운도 깃들지 못했다. 대가족 속에 사는 숫기 없는 아버지는 드러내 놓고 엄마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에게 쏟았다는 무한한 애정을 보면, 분명 아버지는 엄마도 귀히 여겼을 것이라 짐작만 할 뿐이다.
엄마가 대가족에서 분가하여 홀로서기를 한 후, 아버지의 제사는 양반의 가문에선 용납되지 않는 딸이 제관으로 치러졌다. 시골 마을 친척의 양자 입양 권유도, 사촌 오빠의 제사 봉사도 모두 마다하고 엄마는 서울로 제사를 모시고 왔다. 친척 어른들은 상것들의 행태라고 혀를 찼어도.
젊은 시절 엄마는 군수로부터 열녀 표창을 받게 하겠다는 집안 어르신들의 추천을 찬바람 날 정도로 단칼에 거부했단다. 엄마의 태도를 넘겨짚은 이웃 아지매가 이곳저곳 중신을 서기도 했지만, 재가는 엄마의 관심 영역이 아니었다. 일부종사 유교 도덕의 실천 때문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맞닥뜨린 자유를 오롯이 맞아들이려는 의지였으리라. 내 나름의 짐작이다. 양반 법도에 맞지 않은 딸의 제사 봉사를 받은 아버지. 이제야 엄마와 같은 절에서 스님의 목탁 소리를 들으며 한 상 차려진 공양을 드시게 되었으므로.
전생에 몇천 겁의 인연이 쌓여야 부부가 된다는데, 두 사람은 그 어려운 만남에서 겨우 두 번의 사계절을 함께 하고 이별한 애처로운 부부가 아닌가. 이승에서 맺은 짧은 인연, 새로운 세상에선 또 어떤 연줄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견우와 직녀처럼 고요한 산사에서 피워올린 향 내음 따라 매년 만나시는지. 그 기적 같은 만남이라도 이루어졌다면, 생전에 못 나눈 부부의 애틋한 정을 다시 나눌 수 있으련만.
가끔, 아버지 산소 가는 길을 가로막은 뱀이 자꾸 눈에 밟힌다. 신사생 뱀띠 엄마가 미리 와서 아버지 봉분을 돌아본 것은 아니었을까. 오월의 아카시아 향기에 둘러싸인 무성한 초록이지만, 혼자서 산소 자리에 외롭게 맴돌다 돌아갔을지 모르는 엄마의 영혼. 부디 아버지와 오월의 기적으로, 멋진 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