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eun Feb 26. 2019

02 왜 바젤에 가요?

건축가와 디자이너의 바젤 여행기

메시지를 받았을 때, 나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하지만 해가 가기 전에는 마무리지어야 하는 일들에 치여 정신없이 지내던 때였다. 휴가도 다녀오지 못했다. 쌓여가는 피로감보다 더 강하게, 갈증이 느껴졌다. 뭔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무엇으로?' 아, 생각하는 것조차 피곤하다. 결국 어떤 계획도 세우지 못하는 중이었다.


"연휴에 비트라 캠퍼스 같이 가실 분?"


K의 제안은 일정이 명확하고 목적이 심플했다. 게다가 비트라 캠퍼스라니. 디자인 뮤지엄과 비트라 쇼룸이 있는 곳이잖아! 위시리스트에 올려두었던 소품이 생각났다. 알렉산더 지라드 Alexander Girard의 목각인형들. 비트라의 본진에 가서 그걸 사 와야겠다! 귀여운 인형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알렉산더 지라드가 디자인한 나무인형 시리즈. 이 중 무엇을 먼저 들일지는 정해두지 않았다.


구글맵에 비트라 캠퍼스를 검색해봤다. 지도가 휙 돌더니 바일 암 라인 Weil am Rhein이라는 독일 변두리의 작은 동네에 빨간 핀이 꽂혔다. 주변을 살펴보니, 가장 가깝고 알만한 도시는 스위스 바젤 Basel. 그런데 프랑스 생 루이 Saint-Louis 지역에 위치한 '유로 에어포트 Euro Airport'를 바젤 공항이라고 안내한다.


그러니까, 스위스 브랜드인 비트라는 본사가 독일에 있는데, 그곳에 가려면 프랑스에 있는 스위스 바젤 공항을 이용해야 한다는 얘긴가? 


섬처럼 떨어진 한반도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은 혼란스러웠지만, 어쨌든 목적지는 정해졌다. 스위스 바젤로 가자. 애석하게도 직항은 없지만, 치열한 검색 끝에 괜찮은 스케줄로 이스탄불을 경유하는 터키항공편을 이용하기로 했다.


바젤 공항의 정식 명칭은 ‘유로 에어포트 바젤-물루즈-프라이부르크 EuroAirport Basel-Mulhouse-Freiburg’. 스위스, 프랑스, 독일이 함께 쓰는 공항이다.


"어느 쪽 좌석이 좋아요? 창가? 복도?"

K와의 여행은 처음이라, 궁금했다. 나는 절대적으로 창가를 선택하는 타입이다. 창가 자리가 없을까 봐 좌석 선택도 미리 해둔다. 답답한 비행기 안에서 구름을 구경하며 멍 때리는 재미가 쏠쏠하고, 비행기 특유의 창문 프레임을 통해 하늘을 보는 게 너무 좋다.


K는 어느 쪽인가 하면, 역시 창가를 선택하는 타입이었다. 이유는 사뭇 달랐다. 무려 '지형이 만들어내는 패턴'을 바라보는 게 좋다고 했다. 하늘이나 구름 따위가 아니라 지형이 만들어내는 패턴이라니. 건축가란 이런 건가.


결국 우리는 나란히 앉아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나 추억을 나누는 것을 포기하고, 옆자리에 앉게 될 사람이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팔걸이를 독점하는 것도 모자라 내 영역까지 무지막지하게 침범해올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앞뒤로 각각 창가에 앉읍시다."


덕분에 보게 된 ‘지형이 만들어내는 패턴’ 일부. 너무 멋지잖아!


일단 비행기표는 샀다. 그런데 바젤에는 뭐가 있지?

처음엔 아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찾아볼수록 바젤은 매력적인 곳이었다. 개성 강한 뮤지엄이 40개나 있고, 도시를 가로질러 라인강이 흐르고, 그 유명한 바젤 대학과 유서 깊은 호텔, 트렌디한 샵들이 있다. 게다가 스위스 북쪽 국경에 접하고 있어, 프랑스의 롱샹 Ronchamp이나 독일 프라이부르크 Freiburg에 다녀오는 계획도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많은 매력에도 불구하고 바젤로 여행을 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거길 왜 가요?"


주변 사람들도 표정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바젤이라니. 출장이나 학회 때문에 겨우 가는 도시로 굳이 찾아간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명절 연휴에 어디로든 가볍게 떠날 수 있는 내가 하필 바젤을 선택한 것이 어쩐지 그들을 실망시킨 듯했다. 거기 대체 뭐가 있는데? 스위스라면 융프라우를 가야지, 그린델발트가 얼마나 좋은데, 하면서 푸른 초원과 파란 하늘, 만년설이 뒤덮인 산이 어우러진 풍경의 아름다움에 대해 역설하기도 했다. 알프스를 사랑하는 사람이 주변에 이렇게나 많았다니!


하지만 나는 그랜드캐니언을 보면서도 졸았던 사람(미안합니다). 대자연은 분명 감동적이겠지만, 일주일 내내 바라볼 자신은 없다. 그보다는 '헬베티카 Helvetica' 서체가 탄생한 도시, 유명 현대건축가들의 건물이 밀도 높게 들어선 도시, 한 번도 전쟁을 겪지 않은 도시가 궁금했다.


여전히 일에 파묻힌 채로 틈틈이 구글맵에 핀을 꽂는 사이, 떠나는 날짜는 차곡차곡 다가오고 있었다.

욕망으로 뒤덮인 바젤
매거진의 이전글 01 여행의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