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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bridKIM Mar 02. 2019

03 헤르조그 & 드 뫼롱의 도시

건축가와 디자이너의 바젤 여행기


# 도착


바젤 여행을 처음 제안한 지 5개월, 인천을 출발한 지 18시간 만에 우리는 바젤에 도착했다.

출입국관리소의 심사관은 바젤에서 8일 동안 관광을 이유로 머물 거란 사실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입국을 거부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항 밖 풍경. 비가 내려 조금 쌀쌀했다.©hybridKIM

공항을 출발한 50번 버스는 연기를 뿜어내는 외곽의 공장지대를 지나 트램으로 갈아탈 수 있는 다소 한적해 봬는 거리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비가 내려 날은 조금 쌀쌀했고 사람이 다니지 않는 거리는 여행으로 한껏 들떠 있는 우리의 기분을 고양시키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 못했지만, 우리는 그저 좋았다.


도심으로 들어서자 일순간 디자인 잡지의 한 페이지 속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대단히 화려한 무언가는 분명 없었다.

수세기 동안 그 자리를 지켰을 법한 건물들과 간결하고 단순한 현대의 건물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더없이 단정하고 정갈했다. 아름다웠다.


체크인은 가능했으나 입실은 불가능한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숙소에 짐을 맡기고, 일단 나가 보기로 한다. 이 단정한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떡진 머리가 신경 쓰였지만 간단히 세수 정도로 타협했다.


숙소를 나와 조금 걷자 눈 앞으로 라인강이 펼쳐졌다.


골목을 돌자 나타난 라인강변과 물살이 센 라인강 위를 떠다니는 백조들.  ©hybridKIM

라인강, 그 익숙한 이름 덕에 낯선 곳에서 옛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반가웠지만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라인강을 떠다니는 백조들과 잠깐의 대화를 나눈 우리는 출장 온 자의 본분을 상기하며 다시 시내를 향해 걸었다.

일단 지친 몸에 카페인을 투여하며 오늘의 일정을 상의하기로 했다.



# 서로의 취향


다행히도 디자이너 E와는 취향이 비슷했다.

달랑 비트라 하나 보러 스위스를 가자는데 따라나서는 호기로움에서도 이미 알아차렸지만

'스위스=알프스와 그를 위시한 대자연'의 공식을 내밀며 우리에게 '왜 바젤에 가요?'라고 물어오는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는데서 오는 묘한 쾌감을 즐긴다거나,

비행기 창가 좌석을 향한 애착과 고집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에서 반복적으로 증명되고 있었다. (걱정 마시라. 우리는 싸우지 않고, 각자 앞뒤 창가 좌석에 앉는 평화로운 공존을 택했다.)


그중 절정은 건축가 헤르조그 & 드 뫼롱 Herzog & de Meuron 사무실을 구글맵에 표시해 둔 것인데,  시간이 나면 헤르조그 & 드 뫼롱 사무실을 얼쩡거려 보겠다며 구글맵에 핀을 꽂는 디자이너라니...


이 취향이 통한 덕분에 우리는 바젤의 수많은 미술관 외에도 세계적인 현대 건축가들의 작품을 위시리스트에 상당수 올려둔 상태였다.



# 헤르조그 & 드 뫼롱을 보유한 도시


호텔에서 제공하는 관광안내서에는 '바젤에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 12명의 작품이 있을 정도로 건축계에서 중요한 도시 중 하나다.'라고 쓰여 있는데, 이 말은 과연 틀리지 않다.

현대 건축의 각축장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비트라 캠퍼스가 있고, (정확히는 독일에 위치해 있지만)

현재 대중에 오픈되어 있진 않으나 프랭크 게리 Frank O.Gehry, 디이너 앤 디이너 Diener & Diener, 사나 SANAA, 라파엘 모네오 Rafael Moneo, 안도 타다오 Ando Tadao, 데이비드 치퍼필드 David Chipperfield  등등 그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벅찰 정도로 많은 건축계 셀럽들이 참여한 노바티스 캠퍼스가 현대건축의 메카로 조용히 그 이름을 알리고 있다.(정말 조용히... 2주에 한번 투어가 있긴 하다.) 


그리고, 현대 건축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가 그룹 중 하나인 헤르조그 & 드 뫼롱의 사무실이 바로 바젤에 있다!

헤르조그 & 드 뫼롱 Herzog & de Meuron

헤르조그 & 드 뫼롱은 바젤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듀오이다.

2001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했고(수상작은 바젤 SBB에 있는 철도 신호소 Signal Box(1999)이다.) 테이트 모던 갤러리(런던, 2002), 알리안츠 아레나(뮌헨, 2005),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베이징, 2008) 등으로 일반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활동해 온 기간은 1978년부터 장장 40여 년에 달하는 까닭에 바젤의 건축물은 물론 도시계획지구까지 도시 곳곳에서 이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바젤을 설명하는 많은 단어들 중에서도 Herzog & de Meuron은 단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50페이지 남짓의 바젤 관광안내서에 그 이름과 건물이 무려 11번 언급될 정도다.(직접 세어 봤습니다.)

심지어 관광안내서는 바젤에 오면 길거리나 카페에서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을 마주칠지도 모른다며 순진한 건축 러버들을 유혹하고 있다.


최근작으로 엘프 필하모니(함부르크, 2016), 스콜코보 과학기술 연구소(모스크바, 2018)등이 있다. 이들이 한국에 최초로 선보이는 작품은 삼탄&송은 문화재단(서울, 2021 예정)이 될 예정이다.

좌로부터 테이트모던, 알리안츠아레나,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좌로부터 엘프 필하모니, 스콜코보 과학기술 연구소, 삼탄&송은문화재단


쿤스트 뮤지엄 카페에서 커피 한잔으로 기운을 차린 우리는 구글맵에 꽂아 놓은 핀을 따라 건축투어를 시작했다. 바젤을 스케치하는 기분으로 걸으 시간 내에 가능한 것들만 '간단히' 볼 생각이었기에 목적지는 대부분 바젤  SBB역 주변이거나 역에서 트램으로 20분 내외의 거리에 있는 것으로 한정했다.


바젤 SBB역까지 걷는 동안 리처드 마이어 Richard Mier, 마리오 보타 Mario Botta 같은 대가들의 오래된 건물들도 지나쳐 왔지만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작으로 갈수록 건축가들의 명성에 걸맞은 아우라가 느껴졌다.

사진으로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실험적인 형태나 다소 과격하고 단순해 보이는 콘셉트들이 재료와 디테일의 힘을 빌어 오히려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간단히' 보자는 다짐은 당연하게도 좋아 보이는 것들 앞에서 간단히 무너졌다.

디자이너 E의 눈에는 무엇이 보였을까?

우리는'실제 와서 보니 훨씬 좋다'는 정도의 짧지만 격한 공감만을 공유한 채, 해가 져서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을 때까지 출장 온 자로서의 소임에 몰두다.


아, 이제 춥고 배가 고프다.





Signal Box(Herzog & de Meuron, 1999)

'도체의 전하는 도체 표면에만 분포하며 상자 내부에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패러데이 상자의 법칙을 건축물 용도(철도 신호소)와 매칭한 이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는 건축계에는 충격을 이들에게는 프리츠커상을 안겼다. 구리 재질의 외피는 낙뢰 등의 외부 영향으로부터 철도 신호소의 내부 전자장비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Sudpark(Herzog & de Meuron, 2012)

  ©hybridKIM

저층부의 리테일, 상층부 고령자 아파트로 이루어진 이 주상복합건물은 차별화된 창의 형태가 특징이다. 다소 두서없어 보이는 창의 배열은 알고리즘에 따라 패턴이 만들어지는 파라매트릭 프로그램으로 디자인되었으며 외부에서 봤을 때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내부에서 봤을 때는 기대하지 않았던 형태의 조망을 제공하려는 의도로 계획되었다. 콘크리트의 거친 표면처리와 매끈하고 날카로운 metal 프레임의 조화, 창의 깊이 차이에서 오는 음영이 주는 시각적 즐거움은 낯선 창의 형태에서 오는 이질감을 상쇄시킨다.



Meret Oppenheim Hochhaus (Herzog & de Meuron, 2019)

아파트, 사무실, 카페 및 레스토랑이 있는 주상복합건물로 각각의 프로그램을 가진 볼륨을 쌓는 방식(stacking)으로 계획되었다. 볼륨들을 어긋나게 쌓음으로써 각 프로그램별로 대규모 야외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파사드에는 접이식 슬라이딩 셔터 시스템 차양이 적용되었는데, 이는 각 단위공간들의 차양의 개폐에 따라 건축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효과를 만든다.








Schaulager Museum (Herzog & de Meuron, 2013)

독일어로 '보다'를 뜻하는 '샤우언'(schauen)과 '창고'를 뜻하는 '라거'(large)의 합성어다. '보여주기 위해 쌓아 두는' 수장고형 미술관으로 전시실과 보관창고로 분리되는 전통적인 전시시설의 형식에서 탈피해 진열된 상태에서 보관과 전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개념이 적용되었다. 사진으로는 투박해 보일 뿐이었던 측벽의 재료는 시공 당시 현장에서 굴착된 자갈을 콘크리트와 섞어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정면의 매끈한 흰색 표면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 또한 그 자체로도 정면의 다각형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 선형과 함께 건물의 힘을 보여주는 요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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