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와 디자이너의 바젤 여행기
유럽 배낭여행이 마치 청춘의 상징이자 대학생활의 필수 코스라도 되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혈기왕성하고 의욕이 충만했던 나와 학우들은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덕분에 개강 직후의 강의실에는 갖가지 여행 에피소드가 넘쳐났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후일담은 누군가 스위스에서 온갖 글자가 적힌 전단지들을 주워다가, 서울로 돌아와 그대로 커버에 입혀 노트로 만들어 팔았더니 짭짤한 수익을 얻었다는 이야기였다. 일정상 스위스를 건너뛰었던 나는 그 아이디어에 감탄하면서, 굴러다니는 전단지까지 모두 주워오고 싶을 정도로 멋진 글자와 그래픽이 넘쳐나는 도시의 모습을 막연히 상상했다.
오래된 기억이긴 하지만, 그때 전단지를 주워왔다는 곳이 바젤은 분명 아니었다. 취리히였던가? 하지만 바젤에서야말로 상상 그 이상의 현장을 보게 될 것을 기대했다. 왜냐하면, '헬베티카 Helvetica' 서체가 만들어진 곳이 바로 바젤이니까. 어쩌면 스위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슈퍼스타-폰트가 태어난 곳이라는 자부심이 넘쳐, 바젤 시내에 온통 헬베티카가 새겨져 있을지도 몰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위스 바젤이 헬베티카의 도시일 거라는 기대는 디자이너의 순진한 환상일 뿐이었다. 거리를 다니며 유심히 살펴봐도 헬베티카가 쓰인 곳은 드물었다. 하긴, 바젤의 풍경에는 헬베티카의 모양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관광안내서에 헤르조그 & 드 뫼롱의 이름은 열한 번이나 나온다는데, 바젤을 소개하는 책자 어디에서도 스위스의 그래픽이나 헬베티카의 탄생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서체 따위는 이 도시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 잘못 온 것 같아.
'스위스 스타일 Swiss Style'로 불리는 그래픽 디자인 양식이 있다. 어떤 사상이나 상징도 담겨있지 않은 객관적이고 실용적인 형태가 이 스타일의 핵심인데, '국제 타이포 양식 The International Typographic Style'으로도 불리며 유럽과 미국까지 전파된다.
헬베티카는 이런 스위스 스타일을 대표하는 서체다. 이름부터 라틴어로 스위스를 뜻하는 '헬베티아 Helvetia'에서 왔다.
사실 헬베티카가 처음부터 이렇게 대담한 이름을 달고 유명 디자이너의 대작으로 등장한 건 아니었다. 헬베티카의 전신은 유럽 전역에서 쓰이던 '악치덴츠 그로테스크 Akzidenz-Grotesk'라는 글자체다. 한글로 치면 '돋움체' 정도. 우리가 워드 프로그램에서 궁서체와 굴림체, 때로 엽서체를 피하다 보면 돋움체밖에 남지 않듯이, 악치덴츠 그로테스크도 권위적이거나 조악한, 장식적인 글자를 쓰고 싶지 않았던 20세기의 모더니스트들이 애용하는 서체였다. 이것을 바젤의 타입 회사 '하스 Haas Typefoundry'에서 매만져 1957년에 '노이에 하스 그로테스크 Neue Haas Grotesk'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하스 신 돋움체' 정도 되겠다.
이 프로젝트의 디렉터는 당시 회사 대표였던 에드워드 호프만 Eduard Hoffmann이고, 실제로 작업을 한 디자이너는 하스에서 대표로 일하다가 프리랜서로 전향한 막스 미딩거 Max Miedinger이다. 그런데 헬베티카의 디자이너로 막스 미딩거만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아 에드워드 호프만이 자꾸 눈에 밟히는 나는 어쩔 수 없는 회사원...
어쨌든, 이렇게 만들어진 서체를 1960년 독일에 소개하게 되는데, 이때 스위스산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헬베티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조선체' 또는 '한반도체' 정도일까 생각해보면 폰트에 붙이기엔 엄청난 네이밍이 아닐 수 없다(스위스하고는 이미지가 많이 다르긴 하지만).
이 회사는 여러 굴곡을 거쳐 독일의 '라이노타입 Linotype'사에 넘어갔고, 현재 헬베티카의 판권도 라이노타입에서 가지고 있다. (디지털 환경과 '신제품'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매우 잘 팔리고 있다.)
헬베티카의 탄생지이면서도 불모지 같은 바젤의 모습에 조금 실망한 채로 여행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트램을 다른 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정류장에 내렸더니 메세 바젤 Messe Basel의 뻥 뚫린 공간 한가운데였다. 우리는 갈아타야 하는 트램을 몇 번이나 보내며 헤르조그 & 뒤 뫼롱이 설계했다는, 바젤의 상징과도 같은 이 공간을 훑어봤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헬베티카를 발견했다.
글자들이 건축의 곡면을 타고 흘러가고 있었다. 바로 그 헬베티카다. 감정과 개성이 배제되어서 사랑받았던 이 서체는 이제 물성도 질감도 놓아버린 채, 정보 그 자체만을 전달하겠다는 목적에 거의 다다른 듯했다. 바젤이 자랑하는 2013년생 현대 건축에 완전히 흡수된 1957년생 헬베티카는 마치 조판용 금속 따위 모른다는 듯, 처음부터 이렇게 존재했다는 듯이 조용하고 우아하게 흘러갔다.
메세 바젤 뿐만이 아니었다. 2016년 지어진 '쿤스트뮤지엄 바젤 현대관 Kunstmuseum Basel Neubau'은 건축 벽면에 소장품의 작가 이름을 담은 글자를 밤새 흘려보낸다. 어느 밤에는 "DANKE ♥" 라며 영문모를 감사인사가 나오기도 했다.
헬베티카를 처음 만든 곳이라는 자부심이나 스위스 스타일이 곧 국제적 스타일이었던 과거가 이 곳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바젤은 이미 그 시절을 다 흘려보내고 다음 단계에 와있는데. 이 도시에서 오직 나만이 오래된 활자가 찍힌 전단지를 찾아 헤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