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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라는 이름으로(2)

잉크처럼 슬픔이 번지다

급하게 항공티켓을 구매했다.

다음날 오전 10시 출발하는 비행기였지만

비행시간만 11:40이 나왔기에

이미 돌아가신 후 하루 지나서 출발에

저녁 늦게나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상주인데 어쩌지..

매형이 둘이나 있지만 경험상 백부상에는

많이들 안 오던데,,


“나 어떻게 해?”

 “화장하는데 꽉 차서
다음날 아침에 해야 한데. “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빠는 참 잊지도 못하게 어버이날에 돌아가시고

나 오는 거 맞춰서 기다려도 주시네.

우리 아빠 대단하다~


이때만 해도 굉장히 이성적이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본 것처럼

하나하나 장례준비를 했다.


그나저나 조문하러 올 사람을 있을까?

라는 걱정이 되었다.

휴직할 때 주변인들에게 연락을 하지도 않고

조용히 오기도 했고

육아휴직 이후에 돌아갈 거라고 예상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나는 무조건 돌아갈 건데..

(나만의 생각인가..)


여하튼 그래서 회사에서도 많이 안 올 거 같았고,

여러 친목 모임들도 이미 코로나 이후에 연락들이

많이들 끊어졌다. 그래서 연락하기가 애매한 상황..


짧은 고민후, 평소에 연락 좀 하고

내 상황을 아는 사람들한테만 연락했다.


그래도 나한테 관심 있는 사람들은 보겠지라는

생각으로 수십 년 동안 안 바꾼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종종 아이 사진만 올리던

인스타/페이스북에도 글을 올리고 비행기를 탔다.


아직도 아빠의 죽음은 실감 나지 않았다.

전날 거의 밤을 새우고 왔기에 피곤할 법도 한데

잠이 오지 않았다.


딸은 아무것도 모르고 신났다.

눈이 충혈될 때까지 애니메이션을 본다.


이 녀석아 아빠의 아빠가 하늘나라로 가셨어!

 ??

마냥 해맑은 아이다.


뉴질랜드 여행의 비수기라 비행기 좌석이 여유롭다.

한국에 갈 생각도 안 했는데,

이렇게 가게 되다니..


괜히 집중도 안되지만 영화를 볼까 하고 둘러본다.


‘헤어질 결심’


보다 잠들다 보다 잠들다 반복을 하다

가슴속에 들어오는 남자배우의 대사가 있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고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이 있고


한참을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

.

.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이제
인천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수화물로 짐을 보내면 찾을 때 오래 걸릴 거 같아

그냥 배낭하나만 메고 왔다. 재빨리 서둘렀다.

공항에 아내가 나와 있었고

몇 개월 만에 만난 딸과 엄마의 반가움도 잠시,,

바로 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한 시간 남짓 달려 장례식장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 정도였다.


아버지께 바로 인사 먼저 드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께 인사를 드렸다.


제일 친한 친구 6명

그리고 회사 후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은 운구까지 들어주겠다고 먼저 제안을

해줘서 너무 고마웠다.

후배들도 잊지 않고 와줘서 고마웠고,,


새벽즈음 되자

조문객들은 다 빠지고 적적함이 감돌았다.

집에서 서류 가져올 것도 있고 해서새벽에 집에 와

필요한 짐을 챙기고 한 시간도 자지 못한 상태로

다시 장례식장으로 갔다.

아내와 딸은 더 자도 될 거 같아서 혼자 차를

가지고 나왔는데 바꾼 도로방향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운전은 이제 아내가 해야겠다….


아침 일찍이라 그동안의 조문객도 없었고,

혼자 와서 꺼진 향을 새 걸로 바꾸고

아버지께 인사들 드렸다.

그리고선 영정사진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이제야 실감이 났다.


아빠가 죽었어…

돌아가셨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멈추질 않는다.


슬픔이 물에 잉크가 퍼지듯 물들었다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난다.


아빠! 참 대단하다.

어버이날에 돌아가셔서 남들 잊지도 못하게

존재감 확실히 굳히더니

평소에 감정 없기로 유명한 내 눈에서 눈물을

이렇게 많이 보이게 하다니.

편안하게 계세요. 건강한 몸으로요.

그리고 우리 가족 잘 지켜주세요.


원래대로라면 어젯밤 10시에 도착해서

다음날 새벽 발인이었는데,, 하루가 더 생기면서

본격적인 조문은 이날 시작되었다.


회사에서 많은 분들이 와주셨고,

지인들도 소문을 듣고 많이들 와주셨다.

연락도 못 드렸는데,,

꼭 보답하면서 살아가리라 마음먹었다.


회사 게시판에 부고글이 올라왔는데

최근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댓글 쓴 걸 본 적이 없었어

너 그래도 회사생활 잘했나 보다~


회사 선배가 이렇게 말해줬다.


점심 저녁 끊이질 않고 많은 조문객들이 와주셨다.

나의 걱정과는 달리 아버지 가시는 길 외롭지 않게 큰 힘들이 되어주셨다.


이윽고 발인시간이 되었다...


막판에 요양생활하시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이 힘든 모습을

보이셨는데 밝은 영정사진을 보니 마음이 풀린다.


아버지와의 문자메시지를 수십 번 읽어보았다.

아버지가 나한테 하는 마지막 메시지였으니..


서로의 대화를 보며

아휴 내가 이때 조금 더 잘해드릴걸 하는

아쉬움도 많이 남는데, 최근 메시지에서

아버지가 가장 하고 싶으셨던 게 눈에 띄었다.


필요한 물건도

몸이 낫는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 집에 가고 싶다”


였다…


화장터를 가기 전에 집에 잠시 들렀다 가달라고

부탁했고 어머니와 첫째 매형 그리고 나만 집에 들어갔다 왔다.


아버지 방에 들어가서

아버지 영정사진을 보고 말했다.


“아빠 너무 미안해.

너무 늦게 데리러 왔네.

집에 오고 싶다고 했는데..

너무 미안해.. “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는 화장 후에

서울 국립현충원으로 잘 모셨다.

아버지는 월남전쟁 참전용사로 국가유공자이셨다

자식에게 장례에 대한 어떤 부담도 주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요양생활하고 계실 때 나누었던

대화를 끝으로 아버지를 보내드리려고 한다.

(뇌경색으로 말씀이 많이 어눌해지셨다)


“아빠 운전면허 갱신하라는데?”

”그냥 반납하자.
아빠 어차피 운전하기 힘들고
어디든 내가 데려다줄게! “

”반납하면 무슨 인센티브도 준데 “

“(어눌한 어투) 아니야. 갱신해 줘”

“어? 왜~ 그냥 반납하자”

“(어눌한 어투) 나중에
네 엄마 아프면
내가 병원 데려가 줘야지…”




아빠.

엄마 내가 잘 모실테니까 편안하게 쉬고 계세요.

우리 어떻게든 또 만나요.

감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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