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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라는 이름으로(1)

이제 편히 쉬세요

2023년 5월 8일

대한민국에서는 어버이날이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는 5월 5일 어린이날도 5월 8일 어버이날도 그냥 넘어가기 십상이다.

이날은 뉴질랜드 학교에서 인터내셔널 학생 중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학생들을 위해

어버이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한 모양이다.


이쁜 쿠키와 손 편지를 써서 왔네..

이것이 행복인가 라는 생각도 잠시..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연락이 온다.


“ 아빠가 상태가 너무 안 좋아지셨어”
“당장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래”

“응 알겠어. 바로 갈게”



나는 굉장히 차분했고 의연했다.

사실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미 마음속으로는 장례를 10번을 치렀다.


아버지는 3년 전 뇌경색으로 한쪽이 불편해지셨고 재활을 열심히 하시고 계셨다.

그때만 해도 곧 괜찮아지실 거라는 생각이었는데 중간에 한번 더 뇌경색이 와서 더 힘들어지셨다.

중간에 코로나도 걸리셔서 폐렴도 오시고

점점 쇠약해지셨다가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투병일지를 되돌아보면,,


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렸을 때도 요양원은

현대판 고려장

이라며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계셨다.


그래서 나 역시 요양원만큼은 안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짐했다.


대학병원에서 재활치료를 하다가 병원을 이동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재활병원 비용도 무시할 수 없었고, 요양병원은 요양원 하고 조금은 다른 개념이라고 설명을 들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협의를 하고 요양병원으로 가기로 하였다.

퇴원 수속을 하고 이동하는 내내 아버지의 기분을 살폈다.


“아빠 병원에 자꾸 있을 생각하지 말고 집으로 올 생각 하세요”

..

..

..

병원에 가서 병실을 둘러보니 금방이라도 돌아가셔도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이는 환자가 대부분이었다.

모든 걸 체념하신 듯 보이는 아버지의 표정..


“연명 치료 하시겠어요?”
“동의 사인하시고 가시면 됩니다”


간호사분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혼란스러워졌다.


아 이건 아니다.


그대로 입원을 취소하고 무작정 다른 재활병원으로 향했다.

아버지의 표정도 한결 좋아 보인다.


“아빠 운동 열심히 해서 이겨내자 “


그렇게 재활을 열심히 하셨고 재활병원은 특성상 3개월에 한 번씩 이동을 해야 했다.


대학병원-재활병원-종합병원을 이동하며 재활을 하시면서

집으로 퇴원도 2번을 할 정도로 건강을 되찾나 싶었는데

연로하신 어머니가 아버지를 돌보는 것도 쉬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다 지인이 운영하는 요양병원을 알게 되었고,

요양병원/요양원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를 설득하여 옮기게 되었다.

재활뿐만 아니라 한방치료와 도수치료까지 꾸준히 열심히 받으시며 잘 지내셨다.

아버지는 필요한 건 바로바로 요청하고 불편한 건 어떻게든 이야기하시는 병원에서는 조금(?) 귀찮은 환자였다.


그러다 코로나를 피하지 못하고 걸리시면서

폐렴도 함께 오면서 굉장히 쇠약해지셨다.

이때부터 굉장히 내리막 컨디션이었던 거 같다.


다시 대학병원으로 옮겨서 집중치료를 시작했다.

검사결과 뇌경색이 최근에도 진행이 된 소견이 있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손이 저리고 하는 게 꼭 뇌경색이 한번 더 온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검사를 해도 괜찮다는 종합병원의 말만 들었는데.. 아휴..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뇌경색을 2번 경험하니 3번째는 환자가 느낄 정도가 되는구나..


그렇게 퇴원 후 다시 요양병원으로 가셔서는

기존처럼 재활에 집중을 못하고 컨디션을 끌어올리는데 집중했다.


그러다 내가 육아휴직을 하게 되고 뉴질랜드로 딸과 함께 가기로 결정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병간호는 누나들에게 넘기게 되었다.


나는 장남이긴 한데 3남매 중 막내이다.


그리고 딸아이를 독박육아를 하다 보니 최근 아버지의 병간호도 굉장히 벅찼다.

비용도 혼자 끌어안고 있다 보니 수천만 원의 병원비도 마이너스 통장으로 꽉꽉 차있는 상태..


사실 중간에

아버지께서 갑자기 화장실을 가시다 넘어져서 응급실을 가시게 되었고

역시 주보호자인 나에게 병원에서는 옆에 있으라는 연락이 왔다.

다행히 아내가 집에 있어서 딸은 두고 새벽 내내 병간호를 했다.

그러다 회사 출근을 무조건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누나에게 연락을 했고 아버지 옆에는 이제 누나들이 있게 되었다.


그날 오후,,

별다른 이상이 없어 이제 퇴원해야 한다고 했는데

누나들이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낸다는 것이다.


“요양원 아빠가 싫어할 텐데?”



누나들은

아버지 친구분이 요양원을 운영하시고

아빠에게도 이미 OK 사인도 받았다며 녹음파일을 들려준다.

아버지와 대화가 녹음된 파일이었고,,

아버지가 알겠다는 표현을 한 파일이었다.


그래..

나만 자식인가.. 누나들도 자식이고 아빠도 알겠다니까..

나의 병간호도 이렇게 마무리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요양원에 가시고

하루,

이틀,,

지나자 아버지에게 연락이 온다.


꺼내달라며, 속은 거 같다고,,


나 외에는 아버지가 치매가 오신 거 같다고 그냥 두라고 했다.

아버지의 형제까지도..


그러다 스스로 119 신고도 하시고

나의 장인어른께도 전화해서 꺼내달라고 하시고,,

막판엔 자해까지 하시기 시작했다.


아 이건 아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다시 내가 모셔야지..

그렇게 거의 반 강제적으로 아버지를 다시 편안하게 계시던 요양병원으로 모시고 왔다.


그리고 아버지는 요양원에 간 기억을 하지 못하신다.

죽을 만큼 괴로워서 잊으셨던 걸까?

차라리 잘됐다. 안 좋은 기억을 해서 뭐 할까..


그렇게 또 수개월이 지났고

아버지도 편안해 보이셨다.


“아빠 나 육아휴직 내고
뉴질랜드에서 1년만 있다 올게.
1년만 잘 버티고 있어”

“응 알겠어.
내 주식에 있는 거 다 가져가”



병원비가 계속 마음속에 짐처럼 있으셨나 보다.


다시 누나에게 아버지를 부탁드렸고

누나네 집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아버지를 옮기게 되었다.



뉴질랜드 출국 3일 전


누나에게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가족을 못 알아보고 치료를 위해 중환자실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갔던 병원에서 아버지는 상태가 안 좋아 보이셨다.


“아빠 나 왔어. 아빠”



살짝 기척이 보인다

옆에 있던 간병인께서는

“아들은 좀 알아보시는 거 같네요 “


라고 했다.


그렇게 다시 병원에서는 어떻게 치료를 할지를 물었다.


“아빠는 지금 것 스스로의 의지로
버티고 견뎌왔기 때문에
가족이 아빠를 포기하지 않으면
아빠는 이겨낼 수 있을 거야!!

“후회할 행동들 하지 말아!”



나의 강한 외침에 가족들도 조용하다.

그렇게 아버지는 치료에 들어갔고 호전과 위기를 몇 번 겪으셨다.

끝내 인지력은 찾지 못하고,


2023년 5월 8일 돌아가셨다.


그날 병원에서 본 아버지의 모습이 나에겐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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