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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레 Oct 12. 2022

나도 커피나 타면서 돈 벌고 싶다

위로였을까

동기와 함께 한 부서에 발령을 받았다. 나랑 나이가 같은 남자 동기였다. 나는 대학원을 다니다 입사했기 때문에 군대에 다녀온 남자 동기들과 나이가 비슷했다. 어색하고 두려울게 많은 첫 회사생활, 동기와 함께 부서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어서 든든하고 위안이 되었다.



부서 배치 첫날 부장님과의 회의시간. "민수는 ㅇㅇㅇ과장이 하던 업무를 받아서 하고, 너는 서무를 담당하도록 해". 민수(내 동기)는 과장님이 하던 업무를 맡아서 하게 됐다. 선배가 하던 일을 보니 이것저것 가짓수가 많았다. 회의도 준비하고, 보고자료도 쓰고, 기본적인 행정 업무들도 많아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맡게 될 '서무'는 뭘 하는 걸까?



'서무'.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는 몰랐던 단어다. 며칠이 지나자 서무 담당자가 하는 일이 뭔지 알게 되었다.


서무(庶務)

          특별한 명목이 없는 여러 가지 일반적인 사무. 또는 그런 일을 맡은 사람


사전적 정의는 다소 평범하다. 서무는 회사에서 누군가는 꼭 맡아서 해야 하는 일로 그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조직마다 서무 담당자를 별도로 두는 곳도 있고, 막내 직원이 다른 일과 겸해 맡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조직은 서무 담당자를 지정하지 않고, 여러 직원들이 주기적으로 번갈아가며 맡아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회사에는 임원 담당 비서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부서 소속 아르바이트(주로 학생)가 임원 일정 관리, 손님 방문 시 차 접대 등의 업무를 맡아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 아르바이트 학생이 일을 그만두었는데, 그래서 한동안 그 업무를 내가 하게 되었다. 부서에 배달 오는 신문을 관리하고, 임원실 냉장고를 채워두고, 손님이 오면 커피를 탔다. 선배들이 담당하는 일에 일손이 부족하면 거들기도 했다.


직장에 들어가면 신입사원이 커피를 탄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마음에 준비가 되어있었다. 신입사원은 사실 온전한 1인으로서의 역할을 못해낼 때가 많다. 특히 초반 몇 달은 이리저리 시간이 비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 커피 심부름하는 거 괜찮다고 생각했다. "여자만 커피를 탑니까!"라고 하지 말고 "내가 막내니까 할 수 있죠"라고 생각하자 다짐했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예상 못했다. 나이가 같은 동기와 같이 입사했는데, 왜 동기는 업무가 있는데 나는 없을까? 비교가 되기 시작하자 상황이 힘들어졌다.



내가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 동기는 일을 하나씩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선배가 하던 일을 인수인계받아서 진행하는 게 눈에 보였다. 보고서를 작성하고 피드백을 받고. 그런 모습을 보니 내 처지가 좀 슬펐다. 나도 글은 잘 쓸 수 있는데, 보고서 작성은 많이 해봐서 할 수 있는데, 나도 배우고 싶은데. 왜 나한테는 이런 일만 주어진 거지. 내가 이렇게 뒤처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성장하는 것 같아서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남자였으면 어땠을까? 그랬어도 상황이 같았을까? 나는 슬프고 화가 났다. 세상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들었으며 그럴 때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프로답지 못하다고 배웠다. 유연하게 대처하고 세련되게 대응해야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 억울한 마음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신입시절 내가 상사로부터 몇 번 혼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본부장님 개인 유리 주전자를 설거지하다 실수로 깨트린 일

2. 외부 사람과 통화할 때 목소리에 '콧소리' 또는 '애교'를 섞지 않았다고 지적받은 일

3. 상사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빨리 사 오지 않은 일 등



"왜 나는 이런 업무만 해야 해... 커피만 타면서 하루를 보내기 싫어". 한 동료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이때 동료의 대답이 나를 더 멍하게 만들었다. "나는 일이 많아. 바빠. 나도 커피나 타면서 돈 벌고 싶다. 커피 타면서 그 정도 돈 받으면 좋지". 나는 그러기 싫었다. 콧소리를 내고 애교를 부리면서 상사의 예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로서 평가받고 싶었다.



나는 그저 다른 직원들처럼, 다른 신입들처럼, 내 동기들처럼 일을 하고 싶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나는 그저 조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걸 목표로 삼았었다. 그뿐이었다. 회사 내 여성 직원의 권리나, 양성평등과 같은 거창한 담론에는 힘을 쏟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나도 업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나에게 '페미니스트' 이미지를 안겨주었다. 누군가는 좋은 의미로, 누군가는 따가운 눈총으로 말했을 거다. 보수적인 조직에서 무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걸까.




그렇게 반년이 지나고 인사이동이 있었다. 새로 발령받아서 온 선배는 내 업무분장을 보더니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ㅇㅇ사원만 왜 본인 업무가 없지? 이 친구도 본인 업무가 있어야 일을 배우고 재미를 붙이지". 그 선배의 말 덕분에 나는 본 업무가 생겼다. 적성에 맞는 일인지,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나도 다른 동기들처럼 '내 일'이 생겼다는 게 좋았다.



이때의 고마움 때문인지, 아니면 좋은 뜻으로 그런다고 이해해서인지, 그 과장님한테는 업무를 배우면서 수없이 많이 혼나고 지적받았지만, 오히려 사이가 더 끈끈해졌다. 일 잘하는 선배한테 일로 혼나니까. 결국에는 그게 나한테 도움이 되고, 내가 성장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 혼났을 땐 물론 정말 화가 나는 순간도 종종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그 과장님은 내가 좋아하는 선배, 직장동료이자 좋은 친구로 남아있다.



몇 년이 지나 이 글을 쓰면서 나의 신입 시절을 곱씹어봤다. 돌아간다면 그때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것 같다. 주어진 일을 받아들이고 수행해 나가면서 좀 더 긍정적으로 대응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조직 생활에서는 단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장기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었다. 타인의 비위를 맞추는 게 아니라 결국은 나를 위해서, 잠시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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