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텐도, 코에이는 영원한 친구
겜수저를 물고 태어난 나는 유년기 때부터 닌텐도, 코에이에서 만든 게임을 달고 살았다. 그때 즐겼던 작품들은 지금 해도 정말 재밌다. 익숙한 장르란 점도 있지만, 게임 자체가 정말 잘 만든 수작이기 때문이다.
버블경제 때 만들어진 일본의 각종 문화(특히 게임·만화)들은 지금 만들라해도 못 만드는 작품이 많다. 완성도는 설명이 필요없고, 일러스트, 스토리라인, 배경고증 등 부가적인 요소들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어마어마한 작업량과 섬세한 디테일들은 돈이 남아돌던 당시 일본에서 전부 인력(자본)으로 메꿨으니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 지금이어도 못 따라가는 게 당연하다. (그때 벌었던 자본으로 지금까지 먹고사는 일본이 오늘날에도 1980년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해된다.)
아키라, 드래곤볼Z, 에반게리온, 카우보이 비밥 등 그때의 만화는 명작(名作) 반열에, 젤다, 마리오, 포켓몬, 코에이삼국지 등 90년대 게임들은 문화(文化)의 영역이 됐다.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 내렸을 때 닌텐도 캐릭터들이 두팔 벌려 환영해주는 그림은 그 어떤 것들보다 관광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리라. 나도 그 친구들을 보자마자 어렸을 때 알고 지냈던 친구들을 타지에서 마주쳤던 것처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한 친밀감을 느꼈다. 마치 낯선 곳에서 소꿉친구들을 만난 거 같달까. 덕분에 혼자 갔던 오사카 여행은 전혀 외롭고 낯설지 않았다.
일본게임의 다양한 부가요소 중에서도 나는 'BGM'이 제일이라 생각한다. 무심코 듣게 되는 음악이라고, 그냥 효과음 정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유소년기 때 들었던 멜로디들은 순간 몰입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포인트다. 도입부만 들어도 어린 시절, 친형과 작은 모니터에 온몸을 기울이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음악성도 뛰어난 만큼 팝송이나 가요 대신 즐겨들었었다. 유튜브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그때, 피처폰 녹음기능을 활용해 게임 속 상황을 하나하나 다시 재현해가며 손수 녹음해서 듣고 다닐 정도였다. 수풀서 포켓몬을 마주쳤을 때 나오는 BGM, 마리오가 쿠파성에 들어갔을 때 나오는 8bit 멜로디, 조조가 관도대전을 앞두고 흘러나오는 관현악은 듣기만 해도 그 장면이 그려진다.
게임 속 상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제작자들이 만들어낸 BGM들은 어느새 나랑 20년 지기가 됐다. 그만큼 익숙해졌고 곡 처음부터 끝까지 외울 정도로 많이 마주했다. 일상 속에 녹아든 이 음악들을 설거지하거나 청소할 때 자주 흥얼거리는데, 훨씬 즐겁고 빠르게 일을 끝낼 수 있다. 노동요인 셈이다. 특히 요새는 헬스 할 때 들으며 운동효과를 높이곤 한다. 게임 BGM뿐 아니라 그랑죠 OST(대지의 테마 : 그랑죠 소환음악), 드래곤볼Z OST(이전 이야기 설명 BGM), 사이버포뮬러 OST 등 웅장한 음악을 섞곤 하는데, 플레이리스트가 넘어갈 때마다 전투력이 배가된다. 마치 BGM이 흘러나오는 그 장면과 무게를 치는 장면이 겹치면서 더 강력해지는 느낌. 또 곡 길이도 길어야 3분 남짓하니, '웨이트 1세트 후 1분 쉬는 루틴'에도 최적화돼 있다.
또 친숙한 게임 BGM은 그 어느 노래보다 내게 좋은 각성제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집중할 때 수풀소리, 카페소리, 도서관소리 등 백색소음을 듣는 것처럼 익숙함을 두른 BGM들은 내게 카페인이다. 카페에서 책을 읽을 때, 리포트 작성으로 집중력이 필요할 때, 업무마감이 1시간도 안 남았을 때 게임 BGM을 들으면 절로 몰입하게 된다. 사람마다 편한 노래가 다르다는 연구(헤비메탈이 모차르트보다 편하다는 사람들이 있음)처럼, 나는 오래된 친구 같은 게임 노래들을 찾게 된다. 게다가 최근 유튜브에는 로파이 버전, ASMR 버전 등 가지각색 버전으로 들을 수 있어 질릴 틈이 없다.
유튜브를 쓰면 13살 때처럼 핸드폰으로 녹음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좋지만, 영상마다 달려있는 댓글도 재미요소 중 하나다. 스크린을 슥슥 내리며 댓글을 살펴보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곤 한다. 혼자서만 이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비슷하게 느꼈거나 공감을 부르는 댓글에 좋아요를 누르다보면 마음도 훈훈해지고 시간도 금방 간다.
천진난만했던 그때와 달리 현실에 지친 어른이들이, 옛날 BGM이라는 주제로, 댓글창이라는 거실에 모여, 어디다 털어놓을 수 없던 자기의 사연을 나누는 거라 생각한다. 그 모습을 그리다보면 옹기종기 모여 게임이나 만화로 즐겁게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사람 간의 거리가 멀어진 요즘 인터넷으로 속마음을 공유하고, 공감하고, 각자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느슨한 유대'가 21세기 최적화된 인간관계 형태 같다.
+ 2022년의 내가 무얼 듣고 있는지, 나중에 궁금해할 미래의 나를 위해 리스트를 정리해봤다.
https://www.youtube.com/watch?v=Uq7kyf1T_lk
페르소나5 르블랑에서 나오는 BGM 'Beneath the mask-rain'을 리믹스해 픽셀아트까지 더해진 버전이다. 책 읽을 때나 혼자서 생각하고 싶을 때 자주 틀어놓는다. 백색소음인 빗소리에 서정적인 페르소나의 분위기가 잘 어울리는 곡이다. 비오는 날 카페에서 창밖을 보면서 듣고있다 보면 배경인 '욘겐자야(四軒茶屋)'와 함께 다녀왔냐고 묻는 사쿠라 소지로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 음악을 듣고 싶어서 게임을 안하고 르블랑 카페에 주구장창 머물러 있던 기억도 있다(플레이타임을 100시간 가까이 만든 요인).
인생 게임을 꼽으라면 언제나 망설임 없이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을 말한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요소를 갖춘 게임 젤다의 전설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Hiraeth'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나 지역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을 나타내는 Hiraeth는 게임 젤다의 전설을 관통하는 단어다. 야숨만의 서정적인 배경음악을 듣다보면 만난 적 없는 이를 그리워 하거나, 가보지 못한 곳을 떠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여담으로 나는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 타이틀을 3번이나 구매했다.) 잔잔한 BGM에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까지 더해져 야생의 숨결의 매력을 더 높여준다. 독서할 때 1순위로 틀어놓는 BGM.
https://www.youtube.com/watch?v=VsOAk6doBzs
틀자마자 나도 모르게 '아스라다!'를 외치게 된다. OST를 듣는 것만으로도 과속하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실제 영상댓글 중 "운전할 때 틀면 제로의 영역에 가기 때문에 조심하세요"라는 코멘트가 있다. 이 곡은 도입부 이후 첫 클라이막스에 다다른 다음, 2:35부터 다시 속도를 내는 부스터X부스터 형식이다. 두번의 클라이막스가 있는 만큼 헬스할 때 제격이다. 한번 무게 치고, 1분 쉬고 다시 무게를 치는데 최적화. 최근 운동할 때 자주 틀어놓고 있는 음악.
https://www.youtube.com/watch?v=RVknseBomb0
유소년기 때 봤던 만화들은 두근거림과 함께 왜인지 모를 긴장감이 있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해 풀어나가는 서사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착한 놈이 이기는 ‘권선징악’ 구조를 그때는 잘 몰랐기 때문이다. 주인공 버프로 억지로 이기는 구조가 아닌 악당들에게 당하고 당한 끝에 물리치는 클리셰는 '슈퍼그랑죠'가 그 대표격이라고 본다. 일렉기타로 시작해 긴장감과 몰입감을 높여준 그랑죠 OST는 어떻게 만들었나 싶다. 도입부부터 웅장한 이 BGM을 틀면 항상 속으로 외친다. '도막사라무!'
https://www.youtube.com/watch?v=z5Dms2tEbhI&list=PLkrw3RB35lhWngwxC0lYI79ndy5iso-nK
코에이가 만든 명작, 침착맨이 좋아하는 '영공조징(영걸전·공명전·조조전·징기스칸전)' 중 제일인 조조전을 안 해본 친구들이 주변에 없었다. 특히 관도대전, 적벽대전, 오장원전투 등 큰 전투를 앞두고 나오는 2번째 트랙은 듣자마자 심금이 울린다. 살짝 저음질의 관현악 연주가 더해져 그때 당시 느낌을 잘 살렸다. 이 BGM은 프로젝트 발표를 앞두거나, 중요한 시험을 보기 직전 등 긴장되는 일이 있을 때 주로 듣는 용이다. 위나라 장수들과 함께 출격하는 장면이 오버랩돼 그 어떤 난세라도 헤쳐나갈 수 있을 거 같은 느낌.
https://www.youtube.com/watch?v=Z-U3YLL8koI&list=RDZ-U3YLL8koI&start_radio=1
'마중적토 인중여포'라는 말처럼, 여포는 압도적인 캐릭터성을 갖고 있다. 유관장 3형제와 1:3 일기토를 한다던지, 조조가 자랑하던 여섯 장수를 일기당천하는 등 엄청난 프레셔를 내뿜는 캐릭터다('방구석 여포'라는 말이 생길 정도). 다양한 삼국지 시리즈 중 13번째는 BGM이 가장 잘 뽑힌 라인이라 평가받는데, 제갈량 테마, 관우 테마, 조조 테마 등 각 장수별 배경과 특색을 잘 드러내고 있다. 특히 여포 테마는 듣자마자 100 대 1로 싸워도 이길 거 같은 무쌍느낌을 관현악단으로 잘 표현했다. 여포 테마를 들으면 최후를 앞둔 사람처럼 비장해지고 일기당천의 기세를 갖게 된다. 그만큼 단전을 울리게 하는 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