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직장인을 단단하게 또는 무너지게 만드는가에 대한 경험적 사색
프로페셔널의 자존심, 어디까지 흔들릴 수 있나?
- 역할이 뒤바뀐 회사에서, 나의 존재 이유를 묻다
최근 우리 회사에서는 팀별로 맡아온 일의 경계가 송두리째 뒤집혔다. 영업팀은 갑자기 컨벤션 사업을 맡았고,마케팅팀은 영업을, HR팀은 국제회의 과업의 일부와 사업 결과보고서까지 쓰게 됐다. 이유는 각 팀이 바쁜 시기가 다르기에 효율적인 시간 활용과 어려워진 경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 이니까"라는 말이다.
처음엔 나를 비롯해 모두 ‘이게 뭔 시추에이션인가’ 싶었지만, 다들 어찌어찌, 아슬아슬, 알음알음 일을 해내고 있다. 그리고 모두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좀 복잡하다. 특히, 나의 팀은 최근 3년 중 가장 좋은 수익을 달성했음에도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러면서도 "그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이 정도면 다행이지" 하다가도, ‘이러다 우리 팀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이렇게 업무와 문화가 정착되면 어떠지?" 하는 우려가 밀려왔다.
1. 뒤죽박죽 뒤바뀐 업무, 내 마음도 뒤집어진다
회사에서 맡은 일은 단순히 ‘누가 뭐 한다’의 문제가아니다. 그 안에는 나름의 체계성, 전문성, 자부심, 그리고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 나아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담겨 있다.
사회 심리학자인 반두라는 ‘자기 효능감(Self- Efficacy)’이란 멋진용어로, 사람이자신의 역할에서 성취를 경험할 때 동기부여가 커진다고 했다. 그런데 오너는 “너희가 하는 일은 다 쉬운 일이다. 깊이 파지말고, 그냥 욕먹지 않을 정도로만 해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이 내 마음에 톱날처럼 꽂혔다.
‘내가 그 동안 갈고닦은 전문성은 뭐지? 앞으로 20~30년을 더 일해야 하는데, 이렇게 일해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쪼개듯 맴돌았다.
2. 동기부여는어디로 갔나
인사관리 쪽에서 유명한 데시와 라이언은‘자기결정성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 SDT)'에서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회사는 이 셋을 모-두 놓치고 있다.
•자율성?... “내가 시킨대로만 해. 버튼 꾹, 자율주행모드로 가자”
•유능감? ...“그건 누구나 할수 있어. 전문가보다는 장삿꾼이되자”
•관계성? ...“팀워크? 그게뭐였지...일단 내가 말하는대로~”
이쯤 되면 동기부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남는 건‘월급날만 기다리는 좀비’가 되어가는 내 모습뿐이다.
3. 나는 왜 일하는가 -직장인의 소명
솔직히, 나는 월급만 보고 일하지 않는다. 나름의 자부심도 있고, ‘내가 이 분야의 전문가다’라는 자존심도있다. 모든일이 그러하듯 깊게 들어가면 같은 과정의 반복이며 지루하고 딱딱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형화되고 건조한 요소들이 만나 결과를 만들고 재생산되는 상호작용과 그런 경험의 내재화는 엄청난 경험이 된다.
한번이라도 자신이 스스로 프로젝트를 이끌어 계약을 성사시키고, 고객의 비지니스를 성공시킨 역사가 있다면, 그런 환호와 감사의 회신을 받은 적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사례가 아닌 자기증명의 경험이라 부를만 하다. 이처럼 경쟁과 협력과 노력과 성취감으로 가득한 경험은 단순한 직업적 만족이 아니라 삶의 지표 또는 소명(召命)으로 자리잡게된다.
학교에서 배웠던 막스 베버의 ‘직업소명’의 개념처럼 말이다. 일은 내 삶의 한 부분이고, 내가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회사가 일의 역할을 뒤섞고, 전문성을 낮춰 여긴다면 '경험을 통한 성장하는 사람'이 아닌 ‘답보하며 일만하는 좀비’가 될 것은 불을 모듯 뻔하다. ‘그래도 나는 다를거야!’라고 굳게 멘탈을 붙잡아보려 하지만, ‘정말 이게 맞는 걸까?’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친다.
4. 경계가 있어야 조직도 산다
조직심리학에서는 역할이 모호해지면 갈등, 스트레스, 직무 만족도 하락이 따라온다고 한다. 각자의 영역이 명확해야 서로를 존중하고, 동일한 목표를 지향할때에 최고의 결과를 낼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너무나도 익숙하고 분명하게 드러난 법칙이며, 그 어떤 성공적인 기업의 성장사례에서도 빠지지 않는 명제이다.
역할이 모호해지면 갈등, 스트레스, 직무 만족도 하락이 따라온다.
분업과 전문화는 최소 자원을 투입하고 최대 효용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안이다. 이러한 방안이 잘 자리잡은 조직을 우리는 소위 잘나가는 기업이라고 한다. 물론 좋은 기업과는 다른 말이지만 적어도 기업이 잘되어야 직원에도, 고객에게도 꾸준히 좋은 기업이 되지 않겠는가?
지금처럼 ‘이것도 저것도 다 해봐’ 식으로 가다 보면, 전문성은 희미해지고, 결국엔 모두가 ‘만능이지만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과 조직이 될지도 모른다.
5. 흔들려도,나는 내 길을 가련다.
대표님의 말에 마음이 무너졌지만, 그렇다고 내가 나를, 나의 소명을 포기할 순 없다.
앞으로 20~30년, 나는 내 전문성을 믿고, 내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다. 회사가 내 역할을 인정해주지 않아도, 나는 내 자리에서 의미를 찾을 것이다. 가지가 흔들린다고 새의 날개가 헤지는 것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언젠가 회사도 각자의 역할과 전문성의 가치를 다시 깨닫게 되길바란다. 그 때가 오면, 나는 더 당당하게 내 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며]
조직은 각자의 역할이 모여야 완성된다. 역할이 무너질 때, 우리는 단순히 ‘일’만 잃는 게 아니다.자부심, 동기부여, 좀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존재이유까지 흔들린다. 성숙한 인간이라는 구조물은 '노동'이라는 피땀으로 다진 석축 위에 감성과 이성, 희망과 꿈, 연민과 열정으로 쌓아올려진 유기적 형태의 탑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모양의 탑인가?" 그리고 "나는 나의 모양을 사랑하는가?"
그 답을 찾기 위해, 내자리에서 오늘도 최선을 다해본다. 한 직장인의, 흔들리지만 넘어지지도, 헤지지 않겠다는 다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