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일하는 법’이 ‘잘 돕는 법’임을 알게 된 이유

[꿈과 성장] 사고의 전환이 만든 나의 성장

by 기정사실화

유복함의 환상과 현실

나는 12살 때부터 제3세계에 대한 꿈을 품었다. 그 꿈의 시작은 희망이나 열정이 아니라, 연민과 그 어떤 처절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 어린 시절을 살짝 상기해본다면, 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는 석재공장과 식당 설겆이, 동네 농삿일 등등, 삶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했다. 할머니, 형제들까지 모두가 겨우 입에 풀칠하는 삶. 그 무게를 온전히 감당해야 했던 어머니의 어깨를 보며, 나는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3~4학년 무렵, 나는 프로스펙스 신발이 나이키나 아디다스보다 낫다는 논리를 만들어내곤 했다. "대한민국 제조업 발전"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며, 반 아이들에게 선제 공격이라도 하듯럼 내 논리를 설파했다. 이런 논리는 인정하고 싶지않은 '곤궁한 삶에 대한 부끄러움'에 출발점으로 두고 있었다. 이 모든 기억은 나의 일기장 속에서 다시 발견됐고, 그때의 나는 지금도 새삼 놀랍다.

그럼에도 중학생 입학 때까지 어릴 적 나는 스스로를 유복(裕福)하게 자란 아이라고 생각했다. 워낙 깡촌이라 고만고만했기에 가능했고 나의 근거없는 자신감도 한 몫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유복함이란 것이 내게 얼마나 멀고도 낯선 단어였는지 알게 됐다. 유복함이라는 타이틀을 갖추기위한 조건과 세부적이고 항목들을 알게되며 실은 '유복'과 나는 아주 무관한 것이며, 지급히 자기 방어적 기재에서 발현된 매우 주술적인 암시였을 뿐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살짝 거리를 두고 관찰자적으로 스스로 내린 결론으로 나는 나를 '유복이 있음을 갈구하며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잘하던 아이'였다고 말하고 싶다.


빈곤포르노와 나의 자존감: 부끄러운 꿈의 시발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밝고, 영특한 아이였다. 그것은 철저하게도 내가 만든 나의 이미지 설계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 친구와 선생님에게 친절한 인사와 안부, 매 수업마다 2개의 질문, 방송반부터 서예와 교지편집부 등 다양한 문어발식 동아리 참여, 백일장은 되는대로 나가는 등등이 그런 설계의 예시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나는 뽐내기위해서 아니 본질적으로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기위해 애를 썻다.


그런 나에게 누군가 내 꿈을 묻는다면, 나는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답했다. 고등학교 졸업전까지나는 나의 꿈과 직업에 대해 '시민운동가', '유엔' 같은 '국제기구의 유능한 일원', '국제변호사' 등, "국제"라는 단어가 들어간 멋져 보이는 직업을 줄줄이 나열했다.

학창시절 그럴싸한 꿈의 첫 번째 무대는 인도였고, 이어 캄보디아, 아프리카로 확장됐다.
솔직히 말해, 그 동기는 ‘빈곤 포르노’에서 비롯되었다. 아마도 해당 국가 순서대로 가엾은 아이들을 담은 프로그램의 영상을 티비를 통해 차례대로 봐왔던 탓이라고 본다. 아직도 그 나지막하고 낮은 음색의 나레이션이 들리는 듯하다. 그 음성은 2000년대임에도 우유값을 못내고, 급식비를 지원받고, 집에 쌀이 떨어져 우울한 어린 나에게 영양분도, 칼로리도 없지만 향긋한 인공 설탕같은 작품이었다.
소위 작품이라는 것은 영감준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 영감은 사치였고, 사실 나는 한 줌도 안 되는 씁쓸한 자존감을 타인의 비참함으로 달콤하게 덮어 메우려했다고 회고해본다. 다시보니 그것은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차가운 자위이며 미숙한 위안이었다고 말이다.


아프리카에서 배운 것: 동정에서 협업으로

시간은 흘렀고 어찌되었건 나는 꿈을 틔우기위해 그렇게 제3세계에서 멋진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대학에 갔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몇 년을 공부하고 아프리카의 가나와 에티오피아에 직접 가서 몇 달을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그들은 나름 멋졌고 나름 잘 살고 있었다. 그것이 Fancy하거나 고급스럽다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했다. 물론 54개의 아프리카 대륙내 국가들이 모두 그러하진 않을 것이나 그 모든 국가들을 낮춰 볼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어느정도 감상과 고민을 마치고 면밀히 살펴보니, 그들의 곤궁함은 유럽 등의 서구권에서 시작되어 지금도 꾸준하게도 계속되고 있었다. 새로워진 것이라면 중국, 일본의 간섭과 경제적 볼모의 관계가 새로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이 경험은 내 항로와 철학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나는 이제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해 살아가고 싶다고 느꼈다.
'동정'보다는 '응원', '무조건적인 지원'보다는 '조건부의 협업', ‘인도적 지원제공’보다 ‘실리적 사업제안’이 오히려 그들과 이 지구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게 됐다. 방향만은 그들을 향하지만, 생각의 접근 방식은 달라졌다.


'잘 일하는 것'이 곧 '잘 돕는 것'임을 깨닫다

나는 유능한 일잘러, 뛰어난 사업가, 돈을 부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뛰어나고 유능하고 부를 많이 축적했다는 것은 가치를 만드는 일련의 작업을 잘 해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는 '노동'이라는 행위와 개념을 최소 단위로 삼고있다. 그런 노동은 인류의 삶을 지탱하는 기본 공식이며 완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 노동을 창출ㆍ생산하고 공유ㆍ관리하는 것이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미션에 있어 핵심적인 KPI가 될거라 믿는다. 그렇다면 이 공식을 나는 더 더 잘 다듬고, 체계화하고, 익혀야 할것이다. 이후에는 돕고자 했던 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연구하고, 실용화(=사업화, 제품화, 현지화..)해야 한다는 세부 목적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는 계획을 '잘' 실행 해야한다.


이제 나는, ‘잘 일하는 것’이 곧 ‘잘 돕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선택받지 못한 낡은 수저’가 아니라. 수저 주물틀을 만들고, 제련하는 '수저 장인' 내지 '공예촌의 공장장'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목표로 삼고 있다. 이것이 나와 타인의 운명을 단단하고 빛나게 만들어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민'에서 '협업'으로, 단순한 '지원'에서 매력적인 '제안'으로 나의 철학의 지각변동이 있었다.

이러한 변동은 내 미래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였고, 유복(有福)하길 바라며 땀흘리는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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