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있어 좋다

부산 동네 이야기

by 그림책미인 앨리

바다가 있어 좋다.

문득 푸른 바다가 사무치게 보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사는 동네의 바다는 그리 다정하지 못하다. 집 앞바다를 점령해 버린 거대한 냉동창고들이 성벽처럼 늘어서서 시야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허허로울 때면 무작정 버스를 타고 내 동네가 아닌, 타인의 바다를 찾아 나선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조금만 움직이면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은 바다들이 나를 반겨준다.


가장 먼저 발길이 닿는 곳은 서구의 송도 해수욕장이다. 물리적인 거리로만 따지면 내 일상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다. 하지만 최근의 송도는 예전과 사뭇 다른 옷을 입고 있다. 예전에는 오로지 모래사장과 파도뿐이었던 그곳에 케이블카가 생기고,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조형물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탁 트인 수평선을 기대하고 찾아간 날에는 그 인공적인 구조물들이 오히려 답답함을 불러일으켜 이마를 찌푸리게 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가 너무 보고 싶을 때, 송도는 가장 먼저 나를 품어주는 곳이다. 조형물 사이로 밀려드는 파도를 보며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아 ‘멍 때리기’를 하다 보면, 복잡했던 머릿속은 이내 고요해진다. 비록 인위적인 모습이 섞였을지언정, 언제든 달려와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이 백사장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다시금 안도한다.

조금 더 원시적이고 광활한 자연의 숨결이 그리울 때는 사하구 다대포로 향한다. 다대포는 부산의 다른 바다들과는 그 결부터가 다르다. 이곳은 낙동강 하구의 민물과 거친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역'이다. 강이 실어 나른 고운 모래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백사장은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고 평온하다. 송도가 입구에서 곧장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접근성을 가졌다면, 다대포는 바다를 만나기 위해 드넓은 모래벌판을 한참이나 걸어가야 하는 인내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 걸음 끝에 마주하는 풍경은 그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다대포의 진가는 해가 기울기 시작할 때 드러난다. 서쪽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이곳의 일몰은 가히 부산 제일이라 할 만하다. 얕은 수심 덕에 발목까지만 오는 물결이 거울처럼 하늘의 노을을 비춘다. 그 위를 걷다 보면 내가 바다를 걷는 것인지, 노을 속을 걷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황홀경에 빠진다. 모래갯벌 사이로 바쁘게 움직이는 작은 생명들을 관찰하며 걷는 그 시간은, 도심의 소음을 잊게 하는 완벽한 치유의 시간이다.

사람들의 활기와 이국적인 정취에 섞이고 싶을 때는 광안리로 발길을 돌린다. 부산하면 흔히 해운대를 떠올리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늘 지독한 교통체증이라는 관문을 넘어야 한다. 성격 급한 사람에게는 치유를 얻으러 가다 오히려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받는 길이다. 반면 광안리는 언제 찾아가도 젊음의 에너지가 넘실거린다.

광안대교를 중심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에는 이국적인 풍경이 가득하다. 모래사장 위에 설치된 나무 파라솔 아래 앉아 있으면, 이곳이 부산인지 외국의 어느 해변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낭만적이다.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와 외국인들이 주는 관광지의 활기는 나를 일상의 근심에서 잠시 분리해 준다. 세련된 도시의 감각과 바다의 여유가 공존하는 이곳에 서 있으면, 부산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무엇인지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다 뒤로 먹거리가 즐비해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배경으로 넓은 바다를 볼 수 있고, 또한 음식을 들고 바다를 보며 먹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바다는 계절마다, 그리고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매번 다른 대답을 들려준다. 때로는 거친 바람으로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때로는 잔잔한 수평선으로 헝클어진 마음을 다독여준다. 냉동창고에 가로막힌 집 앞 풍경에 가끔 서운함이 들기도 하지만, 버스를 타고 조금만 나가면 저마다 다른 매력을 뽐내는 바다들이 나를 기다린다.

답답한 마음을 뻥 뚫린 바다로 치유할 수 있다는 것.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날에도 돌아설 곳이 있다는 것. 그 푸른 품이 늘 곁에 있기에 나는 오늘도 부산에서의 삶을 긍정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역시, 바다가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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