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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책미인 앨리 Jan 09. 2023

은밀한 속삭임

< 공감 에세이 >


"일어나라. 얼른! 몇 시고. 어이!"

코로나 덕분에 가지 못했던 목욕탕을 가기 위해 나 잡아 잡수 포즈로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웠다.

일어나기 싫어하는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큰 아이는 귀찮아하며 목욕탕 가는 것을 포기했다.

오늘 하루 일이 없었고 체육센터도 쉬는 날이라 피로를 느긋하게 풀 수 있는 온천 가려고 계획을 다 세웠는데 늦잠으로 인해 가까운 곳으로 갔다.

월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목욕탕에는 많은 사람이 없었다.

얼핏 들리는 소리에 정기적으로 오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작년 여름에 가고 오지 못했으니 때가 얼마나 나올까 기대하며 탕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사람이 많지 않기에 입맛대로 자리를 선택했다.

이동하기 편한 길 쪽에 자리를 잡고 간단한 샤워한 후 뜨거운 물속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밀려오는 피로를 날려주는 노곤 함과 해수탕에만 느낄 수 있는 노폐물 제거되는 기분을 만끽하였다.

무리 지어 있는 곳을 피해 아이와 단둘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뜨겁다며 천천히 들어오는 아이와는 달리 뜨거운 몸에 몸을 맡긴 채 나른해진 나만의 시간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엄마, 부모는 참 대단한 것 같아요."

느닷없이 아이가 부모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니?"

"전 성인이 되면 결혼을 안 할 거라서요. 부모가 되면 자신을 희생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자기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자식만 바라본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조금 알 것 같아요."

아니, 이제 겨우 초등학교 6학년이 이런 생각을 하다니.

한순간에 아이가 훌쩍 커져버린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부모 역할도 하지만 엄마 일도 하려고 노력하잖아."

"네. 그래도 힘들어 보여요. 그런데 아빠 이상해요."

"왜?"

"만날 oo 집안이 싫다고 하면서, 할머니한테 혼난 이야기만 하면서 제가 결혼 안 하겠다고 하니 왜 안 하냐면서 대가 끊어진다는 거 있죠. 웃기지 않나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대가 끊어진다고 말을 했다니. 평소에 비판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남편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요즘 우리 세대는 굳이 결혼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데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어이없었다.

아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엄마, 이다음에 제가 가슴 크고 싶어 성형수술한다고 하면 허락해 주실 건가요?"

으잉? 이건 또 뭐지.

갑자기 가슴 성형이라니.

"왜 하고 싶은데?"

"가슴이 작아요. 지금보다 컸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하는 거예요?"

"네 가슴은 네 키처럼 자라고 있어. 그리고 가슴 성형은 가슴에 보형물을 넣어. 네 가슴이 아니라는 거지.

그래도 하고 싶니?"

"그때 되면 지금보다 기술이 훨씬 발달할 테니 다른 방법으로 할지도 몰라요."

아이고. 이런 고민이 있는지 생각하지도 못했다.

유난히 털이 좀 많은 아이라 털로 고민할 줄 알았더니 엉뚱한 부분을 고민하고 있었다.

© benwhitephotography, 출처 Unsplash



그동안 이야기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목욕탕이 최면인가. 쉴 새 없이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유치원 다닐 때 꿈이 참 많았는데 지금은 세 가지예요.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또 하나는 대학 가서 내 진로 정하는 것 나머지 하나는 배우예요. 만약 배우 오디션 본다고 하면, 배우가 된다고 하면 지원해 줄 수 있나요? 전 내가 가진 재능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이 물음에 대해서는 선뜻 답을 해주지 못했다.

경제적인 지원이 필요한 부분이라 지금 당장 결정하지 못했다.

피아노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지원을 못해준다고 사실적으로 말해 속으로 마음이 많이 아팠다.

내 경제적인 무능에 몰래 울었다.

송곳으로 심장을 계속 찌르는 듯한 슬픔과 고통이 몰려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생각이 떠오르며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지려 할 때 아이가 엉뚱한 말을 했다.

"엄마, 오늘 점심 뭐 먹어요?"

"..........."

목욕탕은 참 이상한 곳이다.

묵은 때를 밀고 난 후 개운함을 느끼는 것은 어디서 오는 감정일까?

아이에게 묵은 때는 그동안 엄마에게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은밀한 속삭임이었다.

사춘기에 첫 발을 들이면서 자기만의 방법으로 '자아'를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누군가에게 터놓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눈치만 보느라 참았나 보다.

항상 동적이고 밝은 아이라 크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동안 쌓였던 묵은 때를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은밀한 속삭임으로 제거하고 싶었던 것이다.

뜨근한 따뜻한 탕 안에 있으면 그동안 담아두었던 생각들이 새록새록 생각날 때가 있다.

나에게 묵은 때는 그런 생각들이었고 아이에게는 은밀하게 엄마한테 말하고 싶었던 속삭임이었다.

"엄마, 오늘 이야기한 거 엄마만 아세요."

쌀쌀맞게 말해지는 작은 아이에게 느꼈던 차가운 바람이 은밀한 속삭임으로 따뜻한 온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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