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반합에 대하여



- 그래서 저는 세상이 정반합, 이 순서로 흘러간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얼마전 루마니아에 다녀왔다.


근 일주일간 호텔에 머물렀기 때문에

중식이나 석식은 호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현지 사람들이 자주 가는 동네 맛집에서 해결하고 싶었다.


1월의 다뉴브 강녘에는

생각보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비둘기처럼 삼삼오오 거닐고 있었다.

사실,

내가 상상했던 동유럽 날씨보다 밝고 따뜻하였기 때문에

짐가방에 꾸역꾸역 가져온 패딩이나

터틀넥 니트 등이 무색할 정도였다.


나는 얇은 점퍼를 걸치고

이가 맞지 않은 보도블럭을 느린 걸음으로 걸어 다녔다.

혹시라도 길에 놓여져 있을 개똥에 조심하면서.


간판들은 오래되었고 큰 정성이나 돈을 들인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진열장 청소 같은 것은 그들의 관심거리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루마니아에서는 Ciorbar라는 스프를 즐겨 먹는데,

그러니까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유럽 스프 그거다.

토마토, 감자 같은 야채에 고기 몇 점이 들어가는 멀건 국 내지 찌개 형태.


"오늘 먹은 음식은 어떤가요? 맛이 괜찮았나요?"


우연히 찾은 Ciorbaria(초르바리아: 초르바를 파는 식당이라는 뜻)의 주인은

동네 식당 주인답지 않게 무척 조심스러웠다.

이렇게 나에게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넨 것도

내가 그 음식점에서 서너번 식사를 해결 한 후의 일이었다.


"맛있어요. 또 올게요."


'제가 그릇을 혀로 깨끗이 다 닦아서 설겆이 할 필요 없으시겠어요' 같은 농담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역시 입 밖으로 내지 못 하고

반 박자 늦게 마른 침만 꿀걱 삼키며 계산을 끝냈다.


초르바리아 나무 문을 열고 나오니

거리에는 밤안개가 자욱히 끼어있었다.


눅눅하게.






예전에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생각해보면 그걸 인정하게 되면 내가 너무 약해 보이고

그래서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했던 듯.



왜 아무도 나를 응원해 주지 않았을까.

왜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내가 베푸는 것에 비해 받는 게 없어서 억울해 하면서도

또 나에게 정작 베푸는 사람과는 친해지고 싶지 않은

진짜 골치 아픈 성격.


근데 웃긴 건

나는 한번도 누군가를 이해해 보려고 한 적도 없고

진심으로 응원해 본 적도

아니,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다는 사실.


나는 언제부터 이런 차가운 씹새끼가 된 것일까.




- 라... 리베데레..


호텔 수영장을 나오면서

루마니아어를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락커에 정리해 주시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신데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셨기 때문에.


그런데 루마니아어가 어찌나 외워지지 않던지

안녕히 계세요라는 뜻의 '라 리베데레'를

수영하는 내내 머릿속으로 연습했다.

근데 막상 또 입 밖으로 내려고 하니까 이게 맞나, 싶고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락커룸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고 조금 시끄러웠다.

당연히 못 들으셨겠지 싶어서 후다닥 나오는데


-라 리베데레!


아주머니가 엄청 큰 목소리로 내 등에 인사해 주셨다.



수영을 하면, 수영을 할 때보다

마치고 나오는 길의 그 상쾌한 느낌이 좋다.

뭔가 무겁고 더러운 내 한 거풀을 훌훌 벗어 버린 것 같아서.


방으로 오기 전

호텔 뒷편 으슥한 곳 버려진 벤치에 항상 웅크리고 자고 있는 회색 고양이가

있는 곳도 한번 가 보았는데

그 옆 밥그릇과 물그릇에 사료와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내가 상처를 받았다면,

나에게 상처 받은 사람도 있겠지.

근데 뭐... 상처 받지 않고 사는 방법이 있을까.

그냥 그렇게 사는거지.'


루마니아 맥주는 맛이 없다.

슈퍼에서 사온 루마니아 맥주 몇 병을

호탤 방 테라스에 앉아 안주도 없이 마셨다.

진짜 맛없다.


다뉴브 강이 잘 보이지 않는다.

겨울 안개가 너무 짙어서.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으니 배가 오가는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무언가 흘러 간다는 것은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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