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2008 - 샌디에이고, 티후아나
출장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처음 대면하는 동료도 있고, 한국에서 이름만 듣던 사람을 직접 마주할 때도 있다. 또 메신저 화면 속에서만 보던 이와 함께 현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하는 순간도 생긴다. 한국에서 온 동료들은 물론이고, 미국 본사의 직원들, 그리고 현지 멕시코 직원들까지. 여러 문화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부딪히며 함께 일하는 경험은 해외출장에서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기회였다. 한국에만 머물렀다면 결코 접할 수 없었을 다양한 인생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또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의 삶을 느끼면서 내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순간들도 많았다.
이 과장은 현지 기술팀의 파트장이었는데, 나보다 10살 정도 연상이었고 이미 멕시코 생활만 10년이 넘은 베테랑이었다. 영어와 스페인어로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기술적인 이해도도 높아서, 현지 공장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인력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회사가 글로벌화의 길로 급격히 나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세 가지 조건 ― 기술, 영어, 그리고 스페인어 ― 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기술을 가진 분들은 많았지만 영어를 전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멕시코 현지 인력들은 대부분 스페인어 이외의 언어로는 소통이 불가능했다. 그러니 이 과장은 단순히 숙련된 기술자가 아니라, 여러 세계를 잇는 다리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현장에서 작업반장을 맡은 사람들 중에는 기술보다는 단순히 영어가 가능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승진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 과장이 가진 존재감은 확실히 남달랐다.
그는 당시에도 여전히 티후아나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의 오랜 꿈은 미국 비자를 얻어 샌디에이고에 집을 마련하고 티후아나로 출퇴근하는 것이었다. 이따금 회사 회식으로 티후아나의 한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우리는 다시 미국 숙소로 돌아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이 과장은 내게 부러운 눈길을 보내곤 했다. “나는 아직 미국 땅을 밟아본 적도 없어.” 그가 그렇게 말할 때의 씁쓸한 웃음이 지금도 기억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샌디에이고와 티후아나는 차로 30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하지만 미국 비자가 없다는 사실 하나가 그에게는 거대한 장벽이 되어 있었다. 같은 회사를 다니며 같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국경 하나를 두고 삶의 무게는 이렇게 달랐다. 그로부터 5년쯤 후, 그는 드디어 미국 비자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가 얼마나 기뻤을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김 부장은 내가 샌디에이고에 머물던 시절, 현지에서 불거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서 급히 날아온 협력업체의 기술자였다. 사실 성함은 이제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김 부장’이라는 호칭만큼은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는 이미 예전에 내가 슬로바키아 출장을 갔을 때에도 함께했던 분이었다. 당시 연세가 예순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쇠를 깎는 기술 하나로 30년 넘게 한 길만 걸어온 베테랑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가진 분이었고, 금속 표면을 정밀하게 다듬는 그의 손끝은 마치 장인의 붓질 같았다.
2000년대 초반, 금속을 가공해 금형을 만들고, 그 금형으로 플라스틱 제품을 찍어내는 기술이 한창 발전하던 시기였다. 기계가 대략적인 형상을 잡아주기는 했지만, 마지막 정밀 마무리는 결국 사람 손을 거쳐야 했다. 그 정밀 가공 분야에서 김 부장은 독보적인 존재였다. 영어는 한마디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세계 곳곳에서 그를 찾는 손길이 끊이지 않았다. 바쁜 일정 속에서 샌디에이고까지 오게 된 건, 당시 우리가 만들고 있던 제품이 그만큼 회사에서 중요하게 여긴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제품은 이후 우리 회사 역사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모델이 되었다.
김 부장의 인생 이야기는 더욱 놀라웠다.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했고, 어린 시절 대부분을 거리에서 보냈다. 10대 후반에야 작은 공장에 들어가 잡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스무 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금속 가공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타고난 손재주가 있었는지, 곧 실력 있는 기술자로 인정받았고, 이후에는 협력업체의 대표 기술자로 자리 잡아 세계 각국을 오가며 출장을 다니게 되었다.
그는 술자리에서 늘 “공부는 해봐야 중간, 기술은 하나만 잘해도 평생 먹고사는 데 지장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인생에서는 분명히 맞는 말이었다. 다만 그때의 나는 기술이 없는 쪽에 가까웠기에, 어딘가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그의 성공에는 약간의 운도 따라주 었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의 손끝에서 나온 결과물들은 그 운을 뒷받침하고도 남았다. 그 시절 나는 너무 어렸고, 그 앞에서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공부만이 인생의 전부라는 상투적인 믿음에서 벗어나게 해 준 사람이 바로 김 부장이었다
현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아니었지만, 출장의 절반을 함께하며 가장 오래 부딪혔던 사람은 정대리였다. 그는 이 과장과 비슷한 연배로 나보다 약 10살 정도 많았고, 부서에서는 생산기계를 잘 다루기로 유명했다.
김 부장이 금형을 깎아 기계를 위한 ‘도구’를 만들어내는 기술자라면, 정대리는 그 기계를 실제로 운용하는 노하우를 가진 사람이었다. 흥미로운 건, 정대리가 원래부터 그 기술을 알던 건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실 이 기계는 개발팀의 박사급 연구원들조차도 제대로 다루기 어려운 장비였다. 그런데 정대리는 끊임없이 매달리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자신만의 노하우를 터득했고, 그 덕분에 신모델이 생산될 때마다 멕시코 출장의 단골 멤버가 되었다.
문제는 그의 성격이었다. 아랫사람인 나에게 말과 행동이 거칠었고, 술만 마시면 욕설이 늘어나며 더욱 거칠어졌다. 내가 조금이라도 영어를 쓰는 걸 못마땅해하는 눈치였고, 술에 취하면 “영어 좀 한다고 나대지 마라”는 말을 하곤 했다.
정대리에게는 특이한 술버릇이 있었다. 술이 어느 정도 올라오면 “등산 가자”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출장자들 사이에서 ‘등산’은 카지노를 뜻하는 은어였다. 그가 등산을 가자고 말하는 순간, 나의 긴장은 극도로 높아졌다. 왜냐하면 그가 술을 마신 이상, 운전은 언제나 내 몫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 카지노에 들어가면, 정대리는 가진 돈을 모두 잃거나 새벽 2시쯤 카지노 휴식 시간이 돼야 밖으로 나왔다. 카지노에 특별히 흥미가 없었던 나에게, 타의에 의해 끌려가야 하는 그 시간들은 고역이었다. 라스베이거스를 출장으로 몇 차례 다녀갔을 때도, 카지노 앞을 스쳐 지나가며 늘 멕시코에서의 그 기억이 떠올라 차라리 발길을 돌리곤 했다.
2년 동안 총 6개월간의 멕시코 출장을 다녔는데, 그중 4개월을 정대리와 함께했다. 긴 시간 동안 불편한 감정이 쌓이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내가 부서를 옮기게 된 데에는 정대리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작용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나름 다양한 경험을 해 보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생은 내가 결코 겪어볼 수 없는 범주에 있었다. 초등학교를 지나 중·고등학교, 대학교, 군대와 취업, 그리고 결혼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틀 안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믿고 살아왔던 나와 내 주변 사람들. 하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종류의 인생 역정이 있다는 걸 출장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거리에서 자라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했지만 손끝의 기술 하나로 세계를 무대로 살아가는 김 부장, 멕시코에서 10년 넘게 버티며 미국 비자를 꿈꾸던 이 과장, 그리고 기계와 맞서며 자신만의 노하우로 자리를 지켰던 정대리까지. 세 사람 모두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그들과의 만남이 내게 영향을 주었고, 결국 내 인생의 자양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지금 다시 정대리와 일하겠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단호하게 “No”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