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2008 - 티후아나, 샌디에이고
샌디에이고는 미국에서 은퇴하고 살고 싶은 도시 순위에서 항상 상위권에 드는 곳이다. 연중 온도와 습도가 안정적이고, 공기도 맑아 사람이 숨 쉬는 것만으로도 쾌적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매일같이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넓게 퍼져 있었고, 바닷바람은 살짝 짭조름한 냄새를 풍기며 기분 좋은 시원함을 안겨주었다. 도시와 자연이 적절히 어우러져 있어서, 조금만 이동하면 고급스러운 상점가와 바닷가, 그리고 산책하기 좋은 공원이 연이어 나타났다.
출장을 왔던 나로서는 그 모든 풍경이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처음으로 골프채를 잡아보며 잔디 위를 걸었던 것도 샌디에이고에서였고, 썬베드에 누워 책을 읽다가 햇살이 따가워지면 수영장에 뛰어드는 여유도 누려봤다. 주중에는 한국에서 함께 온 출장자들과 저녁마다 식탁에 둘러앉아 따뜻한 밥을 먹으며 하루 일을 나눴고, 때로는 가벼운 술잔이 오갔다. 주말이면 숙소 주인아주머니가 수영장 옆에서 직접 고기를 구워주는 바비큐 파티가 열렸고, 그 사이사이에 샌디에이고의 관광지를 둘러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는 지금도 내게 휴샌디에이고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적절한 온도와 습도는 지금도 휴양지 하면 떠오르는 기준점으로 남아 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쾌적한 느낌을 아무런 인공적인 장치도 없이 줄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웠다. 그저 숨 쉬고 걷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도시, 그게 내가 느낀 샌디에이고였다.
숙소에서 회사까지는 차로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음에도, 국경을 넘는 순간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티후아나는 멕시코의 국경 도시로, 미국인들에게는 가까운 여행지이자 술과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값싼 휴양지로도 알려져 있었지만, 동시에 치안이 극도로 불안한 곳이기도 했다.
샌디에이고에서 국경으로 향하는 길은 고급 승용차와 잘 다듬어진 도로가 이어졌지만, 국경을 통과해 티후아나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풍경은 확 바뀌었다. 신호등 주변에는 노점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아이들은 유리창을 닦아주겠다며 차로 다가왔다. 어떤 이들은 작은 장난감이나 사탕을 팔며 손짓을 했고, 또 어떤 이는 돈을 달라며 창문을 두드렸다.
도로는 울퉁불퉁했고, 차들도 대부분 낡아 있었다. 사이드미러가 달려 있지 않은 차, 범퍼가 덜렁거리는 차, 매연을 심하게 내뿜는 낡은 버스들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낮고 허름한 건물들이 이어지는 풍경 속에서 곳곳의 벽에는 낙서가 남겨져 있었다. 매연과 기름 냄새, 그리고 길가 노점에서 굽는 타코의 냄새가 뒤섞여 도시 전체가 복잡하고 거칠게 느껴졌다.
불과 몇 킬로미터 차이밖에 안 나는 거리였지만, 샌디에이고의 평화롭고 여유로운 풍경과 티후아나의 삭막하고 위험한 공기는 극단적으로 달랐다. 그 간극을 매일 오가는 일이 결코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티후아나로 들어서면 나무 한 그루 없는 주황빛 언덕들이 시야를 채웠다. 어느 날, 그 길을 따라 회사를 향하던 중 멀리 산 위에 낯선 물체가 보였다. 처음엔 버려진 옷가지인가 싶었는데, 가까워질수록 그것이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다는 게 드러났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건 다름 아닌 한 여성의 시신이었다.
차 안은 순식간에 무거운 공기로 가득 찼고, 그날 하루 종일 머릿속에는 그 장면만이 떠올랐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 사람들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고, 마치 몸이 다른 공간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출장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국경을 오가며 살았지만, 그때 처음으로 이 도시가 가진 어두운 얼굴과 마주한 듯했다.
또 다른 날, 퇴근 시간이 늦어 혼자 국경을 향해 차를 몰고 가던 일이 있었다. 저녁 8시쯤, 하필이면 어두운 길에서 차 시동이 꺼져버렸다. 주변은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을 뿐, 인적도 드물었다. 가까운 곳에 주유소가 보여 그쪽으로 걸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차를 세우고 길을 나섰는데, 마침 현지에서 일하는 과장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상황을 설명하자 그는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당장 차로 돌아가서 문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말라 했고, 말투에서 전해지는 긴박감에 나도 모르게 뛰어 차로 되돌아갔다. 문을 닫고 잠그자마자,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다가와 차 문 손잡이를 덜컥거렸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는 돈을 내놓으라며 위협했지만, 내가 가진 게 없다고 하자 다행히 순순히 돌아섰다. 그 짧은 순간, 차 안에서 혼자 들리는 건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뿐이었고,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티후아나에서 밤길을 혼자 다니는 일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티후아나에서 샌디에이고로 향하는 풍경은 지금도 생각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저녁 무렵 붉게 물든 언덕 위로 하나둘씩 불이 켜지면, 뜻밖의 아름다움이 찾아온다. 집들의 대부분이 형광등이 아니라 백열전구이고, 이 집들은 대부분 붉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서, 그 빛이 오렌지빛으로 번져 언덕 전체를 따뜻하게 감싸는 모습을 만들었다.
노을빛과 섞여 언덕 위 집들이 환하게 빛나는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 도시에 살아가는 삭막함과 위험이 거짓말처럼 가려지고, 마치 오래된 풍경화를 보는 듯한 고요함이 찾아온다. 이 위험한 도시를 오늘도 큰 문제없이 잘 빠져나가라는 듯이 퇴근길을 밝혀주던 그 길이 여전히 생생하다.
[Epilogue]
티후아나의 낮은 밤만큼 위험하지는 않다.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낮에는 사람들의 일상이 별다른 문제 없이 이어졌다. 물론 샌디에이고와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시내 중심가는 활기가 넘쳤고, 시끌시끌한 아이들이 하교길에 엔빠나다(스페인식 튀김만두)를 사먹던 모습이 아직 기억난다. 교차로에 차들이 멈추면 어디선가 뛰어나와 불쇼를 하고 외발 자전거를 타며 동전을 구걸하던 사람들도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티후아나만의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가끔 현지 동료들이 “여기 타코가 맛있다”며 소개해 준 포장마차에 서서 타코를 사 먹을 때면, 그들의 일상을 조금은 함께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갓 구운 옥수수 또르띠야 위에 고기와 채소, 살사를 올리고, 시원한 콜라 한 캔을 곁들이면 그야말로 완벽한 점심이었다. 출장 기간 동안 몇 번이나 그렇게 길거리에서 타코를 먹었던 덕에, 한국에 돌아와 보니 몸무게가 눈에 띄게 늘어 있었다.
내가 출장을 다녔던 2008년, 티후아나에서는 마약 카르텔과 경찰, 군대 사이의 교전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총격전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티후아나 고위 경찰관의 가족이 집에서 아내와 열두 살 딸과 함께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까지 벌어졌다.
내가 본 낮의 평온함은, 어쩌면 그런 사건들 위에 가까스로 이어지고 있던 일상일지도 모른다. 출장자로서 스쳐간 시간 속에서 나는 그저 잠시 머물렀을 뿐이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매일의 현실이었다. 지금도 티후아나의 붉은 언덕과 백열전구 불빛이 떠오를 때면, 그 아름다움 속에 감춰져 있던 이 도시의 양면성을 함께 기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