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의 기억들(6)

Feb2009 - 티후아나, 멕시코

by 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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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관리팀 담당자 업무의 장점이자 단점은 매일매일 반복되는 업무 특성상 일에 익숙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그 덕에 업무시간이 길게 느껴져 퇴근시간을 기다리며 시계를 보는 일이 많아지는 것도 있긴 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야근이 많은 일도 아니었고, 아직 사원인 나에게 대단한 업무성과를 기대하는 윗분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출장 중 업무 강도는 높지 않았다.


그날은, 업무가 끝난 후 티후아나 시내 일식집에서 협력업체와 관계사 출장자들과 함께 회식이 있던 날이었다. 나는 막내로서 기사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기에 술은 마시지 않고 끝자리에 앉아 회식에 참여했다. 회식은 10시쯤에 끝났던 거 같다, 테킬라에 맥주를 마신 정 과장(승진했다)과 관계사 출장자들까지 뒤에 태우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서둘렀다. 이미 세 번째 티후아나 출장이라 샌디에이고로 돌아가는 길은 라디오를 통해 시간이 덜 걸리는 곳을 알아서 찾아 내비게이션도 없이 다니던 때였다. 잘 가고 있던 중에 옆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 아직 시내를 채 벗어나지도 못했을 때였다. 내 옆으로 경찰차가 보인다 생각했던 직후에 뒤에도 경찰차가 따라붙었고, 이내 멈추라는 듯한 경광등과 사이렌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나는 차를 멈추면서도 이게 무슨 일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는데, 속으로 내가 회식에서 술을 정말 안 먹었었다는 것만 되뇌며 약간 긴장되는 마음으로 차를 세웠다.


경찰차에서 내리라는 말을 듣고 차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까지도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면허증을 보여달라길래 아무 생각 없이 건넸고, 경찰들은 그걸 들고 차에서 뭔가를 조회하는 듯 보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한테 보닛에 엎드리라고 하더니 지갑까지 탈탈 털고 몸수색을 하기 시작하는데… 기분 나쁜 걸 떠나서, 마음속에서는 ‘도대체 뭘로 의심하는 거지?’라는 불안함이 더 컸다.

더 당황스러웠던 건, 같이 움직이던 협력업체 차량도 함께 잡혔다는 점이었다. 그 아저씨들은 영어가 거의 안 돼서 말 자체가 안 통했고, 결국 통역은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됐다. “우리는 아무 잘못 없다, 술도 안 마셨다”라고 설명하지만 경찰들 분위기가 묘하게 차갑고 위협적이었다. 그러던 중 순식간에 경찰차가 더 몰려들었고, 어느새 우리 주변에는 다섯 대, 여섯 대 되는 경찰차가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거의 영화 장면처럼.


경찰들은 우리더러 자신들을 따라오라고 했다.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 조사를 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억울하다고, 술도 안 마셨다고, 왜 끌려가야 하냐고 얘기했지만 상황이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결국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한 5~10분쯤 차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 건물 앞에 도착했다. 건물 안에는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바깥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줄이… 이상했다. 줄에 서 있는 사람들 중 몇 명은 이미 수갑을 차고 있었고, 한두 명은 발목에 족쇄 같은 것도 차고 있었다. 그 순간 “여기… 정말 경찰서 맞지?”라는 생각이 스쳤다.


처음엔 줄 맨 뒤에 서라길래 그대로 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너희 먼저 들어오라”라고 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통역 역할을 하고 있던 내게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안쪽에서는 꽃무늬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40대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도 아니고, 어디 정식 복장도 아니고… 그냥 겉모습만 봐서는 해변가 바에서 칵테일 한 잔 하고 있을 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판사라고 소개했다. 지금 생각해도 황당한데 당시 그는 정말 진지하게, “나는 판사다. 너희가 오늘 잘못한 것에 대해 판결을 내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판사라기엔 복장부터 행동까지 너무 이상했고, 주변 분위기도 어딘가 짝퉁 느낌이 났다. 그런데 그는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결론은 이거였다.


“보험이 없다. 보험 미가입 상태에서 운전했으니 불법이다. 그러므로 벌금을 내라.”

순간 어이가 없어서 바로 반박했다. “우리가 보험을 안 들었을 리가 없다, 이건 정식 렌터카다.”

그러나 그는 “난 그건 모르겠고, 너희는 잘못했다. 그러니 돈을 내라.”라는 식이었다.


그때는 핸드폰 국제전화도 마음대로 되지 않던 시절이었고, 한국에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할 방법도 없었다. 이미 분위기는 우리가 아무리 말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구조로 짜여 있는 느낌이었다. 결국 여기서 빠져나오려면 방법은 하나, 돈을 내는 것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벌금이 얼마냐고 묻자 그는 옆방에 있는 여자 경찰을 불렀다. 그녀는 어디선가 두툼한 책 같은 걸 들고 왔다. 그 책 안에는 ‘벌금 항목 카드’ 같은 게 꽂혀 있었고, 항목별로 금액이 다 적혀 있었다. 그러더니 ‘보험 미가입’ 항목을 쓱 뽑아서 보여주며 말했다.


“인당 300달러.”

운전한 사람이 둘이었기 때문에 총 600달러.

우리는 서로 얼굴만 바라봤다. 당시에 현금을 많이 가지고 다닐 일이 없던 시절이라 당연히 그 정도 돈이 있을 리 없었다. ATM을 찾아다니며 필요한 금액을 마련해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돈을 넘기면서 우리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이건 나중에 반드시 돌려받아야 한다. 영수증이 필요하다.”

그래서 영수증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 ‘판사’라는 사람은 알겠다고 해놓고는, 30분이 넘도록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바깥에서 수갑 찬 사람들과 줄을 서서 영수증을 기다리던 우리는, 어느 순간 서로 눈을 마주치며 같

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이놈들 안 주려는 거구나’


우린 영수증을 받는 걸 포기하고 차 키를 달라고 요구하자, 그제야 경찰들은 비아냥거리는 표정으로 “조금만 기다리면 영수증 줄 텐데 왜 가려고 하느냐”며 황당한 소리를 했다. 더 이상 그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서둘러 경찰서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경찰이든 판사든 그 앞에서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 결국 차 키만 받아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저 경찰들이 오늘 작정하고 동양인 돈을 뜯어내기로 한 거 같다며, 어떻게 벌금을 돌려받아야 할 것인지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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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일단 다 같이 모여서 “숙소 사장님한테 먼저 보험에 대해 들어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멕시코 경찰들이 그다지 청렴하지는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분명 우리 차량의 보험을 문제 삼았었다. 이 부분을 확실히 해야 회사에 우리가 낸 벌금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장님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숙소로 와달라고 했더니, 사장님이 잠시 후 도착했다. 그런데 사장님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다만 “우선은 출근하고 계세요. 제가 처리해 볼게요.”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투가 어딘가 미묘하게 떨리는 느낌이 있었다는 게 지금도 기억난다. 그때 나는 그 불안한 기색이 그저 상황의 황당함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회사에 출근해서 주재원에게 전날 밤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본사에 보고가 돼야 한다면 우리가 절대 음주를 하거나 다른 잘못을 한 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해 달라고 했다. 주재원은 공장의 법무팀에 지원을 요청했고, 곧 변호사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어느 정도 한국어가 능숙한 분이었는데, 변호사와 정 과장, 그리고 나 셋이서 전날 우리가 끌려갔던 그 ‘경찰서’라는 곳으로 다시 향했다.


출발하면서 변호사가 했던 한 마디가 지금도 생각나는데, 그는 “이상하네요. 말씀하신 곳 근처에는 경찰서가 없어요”라고 했다. 나는 판사가 있던 곳이므로, 경찰서가 아니라 재판소 같은 곳일 수도 있겠다고 설명했다. 확실히 그 하와이안 셔츠 아저씨는 자신이 판사(Judge)라고 했고, 앞에 줄 서 있던 사람들은 수갑에 족쇄까지 찬 죄수들이었으니까.


익숙하지 않은 길이기는 해도 정확히 어제 우리가 있던 그곳을 찾아가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장소에 도착해 본 순간… 정 과장과 나는 말문이 막혔다. 어젯밤 죄수들이 줄지어 서 있던 그 건물은 꽤나 큰 ‘폐쇄된 학교 같은 건물’이었는데, 정문은 나무판자로 막혀 있었고, 굳게 자물쇠까지 채워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어젯밤 우리가 경찰차를 따라 들어왔던 그곳의 형태와는 전혀 달랐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여기가 정말 어제 거기가 맞나 싶은 생각만 들었다.


그때 변호사가 허탈하게 웃으면서 한국어로 말했다.


“멕시코에 나쁜 사람들 참 많아요. 미안해요.”


결론적으로, 우리가 겪은 건 경찰까지 동원된 사기극이었다. 멕시코 부패 경찰들이 조직적으로 꾸민 사기극, 나는 이게 정말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맞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경찰차 6대가 우리를 둘러싸고, 사이렌 울리며, 멕시코 말과 영어를 섞어 우리를 협박하고, 몸수색을 하고, ‘벌금’을 내라며 카드까지 꺼내 보여주던 장면들… 도대체 수갑과 족쇄를 찬 밖에 서 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기가 찼다.


이 일은 결국 본사에 공식적으로 보고됐고, 그 이후 출장자들의 티후아나에서의 회식은 모두 금지됐다. 그리고 여기서 더 충격적인 사실이 있었는데.


우리가 탔던 그 렌터카는 정말 보험이 없었던 게 맞았다. 샌디에이고에서 운전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만, 멕시코에서 운전하기 위한 추가 국제보험에 가입이 되어 있지 않은 차량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 경찰들은 진짜 멕시코 경찰이 맞았고, 우리 숙소의 사장님은 또 다른 진짜 사기꾼이었다.


사장님은 렌터카 비용을 우리에게 비싸게 받으면서, 실제로는 국제 보험이 없는 차량을 렌트해 주며 차익을 챙겨 왔고,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이미 세 번째 티후아나 출장을 와 있었던 셈이었다. 운이 좋아 지금까지는 아무 일 없이 지나갔지만, 이번엔 부패 경찰들에게 걸려 진실이 밝혀지는 아이러니한 사건이 생긴 것이었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 숙소 사자님은 다른 숙소보다 많은 출장자를 유치하기 위해 자주 와서 가까워진 출장자들에게는 ‘뇌물처럼’ 돈을 주기도 했고, 실제 숙박비보다 비싼 금액을 영수증에 적어 출장비를 편취하는 일까지 했다고 한다. 결국 숙소는 폐쇄됐고, 회사의 출장 중 숙소 운영 시스템 전체가 바뀌었다. 내가 겪은 일이 직접적인 계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비공식 숙소 이용이 금지된 건 내 사건 이후였으니, 어느 정도 영향은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숙소에서 먹던 한국식 식사와 주말마다 바비큐 파티를 해주던 편안한 서비스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신기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친절한 서비스’ 뒤에 뭔가 찜찜한 것들이 숨어 있었던 거 같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숙소에서 보내는 출장은 없었고, 이후 나는 티후아나 출장을 세 번 더 간 후 부서를 바꾸게 된다.



Epilogue


티후아나의 치안은 사실 좋지 않기로 유명하고, 납치 사건의 70%가 경찰이 연루돼 있다고 할 정도로 공무원, 경찰들의 부패 정도가 심각했다. 내가 출장을 가 있을 때에도 며칠 동안 출근을 하지 않던 거래처의 직원이 속옷만 입고 300km 밖의 들판에서 발견된 일이 있을 정도로 그곳의 삶은 안전하지 않았다. 나는 3번의 출장을 통해 익숙해진 터라 그 불안한 상황을 체감하지 못하던 때였는데, 마침 경종을 울려주듯 이 일을 겪으며 다시 한번 출장지에서의 안전을 점검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동안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고 여러 가지를 챙겨주셨던 숙소 사장님의 어두운 점을 알게 됐다는 점이었는데, 사장님은 그 이후에도 다른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약 10년 전까지는 샌디에이고의 한인사회에서 지역 유지의 위치를 갖고 계시다 들었다.


이제 티후아나 출장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부서 이동 후 더 많은 국가에 출장을 다녔던 일들을 기억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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