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를 의심할 자유

성서무오류설에 대하여

by 꽃피랑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본 성서구절일 것이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것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힘이었다.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의 벽, 남녀차별의 논리 등 조선에서 당연했던 것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원래 집 안에서 살림하는 존재에 불과했던 여성들을 위한 학교와 병원도 기독교를 중심으로 세워졌다.

복음은 당시 억눌리고 차별받던 이들에게 말 그대로 '자유'를 의미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어떤가?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에 저항하는 집단이 되어버린 듯하다.

오히려 시대에 뒤처진다는 비판을 받다 못해 '개독교'라는 단어가 익숙해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그중 하나가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도록 가르치고 그에 대한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교육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녔던 대학에는 '창조와 진화'라는 필수과목이 있었다.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는 진화론을 가르치지만, 그 학교에서 진화론은 인간의 지식이자 무신론적 세계관의 산물로 여겼다.

수업은 창세기가 '과학적'이며 '성서는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진행되었다.

지구의 나이는 6천 년 남짓이고 신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늘 위의 물과 아래 물로 나누었는데

노아의 홍수 때 하늘 위의 물이 다 쏟아진 것이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교수님은 미국 NASA 출신의 박사님이었기에 나는 아무 의심 없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성서가 꼭 객관적으로 증명되어야만 믿을 수 있는 책인가?

나 스스로 그런 질문을 하기까지 거의 몇 년이 걸렸던 듯하다.

사실 성서는 66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세오경을 시작으로 역사서, 지혜문학, 예언서, 서신서, 묵시문학 등이 혼재되어 있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시편, 혹은 사도들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객관성을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성서를 글자에 집착해서 너무 좁게 읽어왔는지도 모른다.

무한한 하느님의 뜻을 인간의 문자와 성서로만 한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서는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보고서나 객관적인 역사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는가?'에 대해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려고 애쓴 사유의 흔적에 가깝다.


한 예로 구약의 역사서만 봐도 그렇다.

바빌론 포로가 된 후, 그 이유를 찾고자 서술한 '열왕기'에서는 우상숭배 때문에 하느님께 선택된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반면, 포로 생활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시기에 쓰인 '역대기'의 관점은 다르다. 성전을 재건하고 다시 하느님을 예배하면 이스라엘이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적 관점을 제시한다.

심지어 같은 왕을 두고 한 책에서는 악한 왕으로, 다른 책에서는 회개한 왕으로 기록한다.


신약의 공관복음서도 마찬가지다.

마태, 마가, 누가는 같은 사건을 전하면서도 세부묘사와 신학적 강조점에 차이가 있고 저자나 시대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서는 사실 여부를 증명해야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 시대마다 새롭게 질문을 던지며 해석할 수 있는 경전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믿지 않을 자유의지까지도 허락하셨다.

그렇다면 그분이 말한 '자유'는 성경을 무조건적으로 믿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질문하고 때로는 거부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성서가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베스트셀러인 이유는,

변치 않는 정답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읽는 시대와 사람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전 08화신앙의 이름으로 널 통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