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잊었지만 나는 기억한다.

죄책감을 놓아버리다.

by 꽃피랑

두 마리의 어린 토끼를 키우는 호랑이부부가 있었다.

둘 중 하나는 부부에게 순종적이었다.

시키는 대로 잘 따랐고 크게 말썽을 피우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 마리가 문제였다.

호랑이부부가 힘들게 먹이를 잡아와도 그다지 고마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훈육을 해도 "왜 그 말에 따라야 하느냐?"라고 되묻기 일쑤였고

성장한 뒤에는 호랑이 흉내를 내며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기도 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한 부부는 말 안 듣는 토끼에게 제대로 버릇을 들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진짜 잡아먹으려고 목을 물지는 않았지만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고 이빨로 귀 끝을 물면서 위협했다.

호랑이에게 그 정도는 그저 장난 같은 훈육일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호랑이부부도 나이가 들었다.

이제는 자기들이 키웠던 토끼들이 자신들의 수고를 알아주고 챙겨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힘들여 키운 토끼들은 호랑이 부부와 가까워질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게 서운했다.




나는 말 안 듣는 토끼였다.

심리검사 결과, 엄마는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강했다.

아빠는 엄마에게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엄마가 겁이 나서 불만을 말하지 못했고 애꿏은 나에게 화풀이를 했다.

상담사 선생님은 말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부모님께서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마다 나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두 분은 따님을 몇 번이나 때렸을까요?"

잠시 망설인 끝에 엄마가 대답했다.

본인은 때린 적이 없고 아빠가 실수로 화가 나서 한두 번 그랬을 뿐이라고.


그건 사실과 달랐다.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말하고 싶어서 무심결에 나온 방어기제였을 수도 있고

단지 엄마에게 일상적인 훈육이었기에 기억에서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무심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줬고

상대방이 오랫동안 괴로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아마 정말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의 마음이 조금 편해질지 물어봤을 거다.


하지만 엄마는 나와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그랬다고?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뭐.. 그랬다면 미안해."


그건 사과라고 할 수 없었다.


엄마는 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관심이 없었고 공감하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거나 폭력을 당한 경험이 없어서 그럴 수 있다.

다만, 힘들게 일하며 나를 키웠는데 이제 내가 본인을 돌봐주기는커녕

거리를 두겠다고 하니 자기연민에 빠져 눈물을 흘렸다.


상담을 받기 전에도 그랬다.

부모님의 말이나 행동에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정해져 있었다.

"네가 예민해서 그래."

"네가 맞을 짓을 했잖아. 너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이야기는 언제나 내 잘못으로 끝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부모님께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상담사 선생님은 내가 부모님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다가갈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미안해하지도 않는 엄마를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엄마가 사과하기를 바랬던 것은 아니지만 그토록 가볍게 넘겨버릴 거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엄마와 멀어지려 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을까?

엄마는 내 감정에 관심이 없는데 왜 나만 엄마의 감정을 살피며 눈치를 봤던 걸까?


한편으로는 나 역시 거리 두는 것에 대해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부모와 자식이라고 해서 언제나 가까이 지내야 하는 건 아니다.

의도치 않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면 오히려 적당한 거리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이제는 죄책감의 굴레에 갇혀 스스로를 탓하기보다는

호랑이에게 긁힌 내 마음의 상처부터 돌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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