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저를 살리신 거예요?

신은 고통을 없애주지 않는다.

by 꽃피랑

나는 신에게 분통을 터트린 적이 있다.


학창 시절,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보통 '주여!' 세 번을 외치고 기도를 시작했다.

대부분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거나, 내가 원하는 것들을 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나는 늘 무언가를 요구하는 기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교회를 옮긴 뒤, 기도의 형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내 말을 쏟아내기보다 침묵 가운데 말씀을 묵상하고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들어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날 묵상한 말씀은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던 이야기였다.

눈을 감고 그 말씀을 떠올리는데, 문득 내가 야이로의 딸처럼 죽어있었다.

"일어나라."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에게 하셨듯이 나에게 말씀하셨고 그 순간 나는 눈을 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왜 저를 살리신 거예요!"

"....."

"어차피 나를 사랑하는 사람 하나 없고 사는 것도 힘든데..왜 내가 다시 살아야 하죠?"

그렇게 나는 예수님을 원망하며 오히려 화를 냈다.

예수님은 그런 나를 묵묵히 바라보시다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그게 진짜 신의 음성이었는지, 내가 만들어낸 상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유야 어찌됐건, 그 말씀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살아갈 힘을 주고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빅터 프랭클은 말했다.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나 역시 그토록 실망해서 아예 신앙을 버릴까 고민했지만

완전히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나는 하느님의 자녀이며 이 고통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교회를 옮기면서 부모님께 많은 비난을 들었고 정말 힘들었다.

그때는 '교회를 바꾸는 게 뭐 그리 비난받을 일인가? 신은 왜 나에게 이런 부모를 주신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 시간들에 감사하고 있다.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지 않았던 부모님 덕분에 외모나 스펙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났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신앙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의심하면서 열린 믿음으로 달라질 수 있었다. 냉정하고 이기적인 나였지만, 억눌리고 차별받는 사람들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고 함께 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변화를 신의 인도하심이라고 믿는다.


신은 인간의 고통을 없애주지 않는다.

때로는 그 고통을 통해 내가 붙잡고 있던 허상들을 내려놓게 하고 내 역할과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흔든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의구심이 든다.

신은 우리를 사랑한다면서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말이다.


나도 정답은 모르지만 한 가지는 조금 알 것 같다.

신은 하늘 위에서 우리의 고통을 내려다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도록 함께 버텨주는 존재일 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나 또한 힘들어하는 이웃에게 그런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


그래서 어떤 날은 살아갈 힘이 없다고 울부짖으면서도

결국 또 하루를 살아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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