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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픽션] 지킬박사와 하이드(4)

나는 미움받고 있다.

by 꽃피랑

회기 중에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항상 8시 전에 출근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혼자 커피를 내려 마시고 오늘 해야 할 일에 대해 정리하는,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아침 8시도 안 돼서 카톡 알람이 울렸다.


박세준 의원은 오늘 업무보고에 사용하려 하니

지금까지 본인이 3~4차례 요구했던 도시개발 관련 자료와 공문들을 타임라인별로 정리해서

오전 중 A4 1장으로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원래 도시개발은 시설업무라 정하윤 지원관이 잘 아는 분야였다.

하지만 내가 담당하는 기획예산부서에 도시공사 관련 팀이 있었기 때문에

도시공사가 관여한 개발 관련 자료를 여러 번 요구했었다.




나는 서둘러 지금껏 받은 자료들을 열어보고 날짜별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출근한 팀장님은 내가 정리하는 동안 관련 자료와 공문들을 모두 출력하고 라벨링까지 해주셨다.

마지막으로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하신 다음, 이렇게 제본해서 의원님께 드리면 될 것 같다고 이야기하시고는 회의참석을 위해 올라가셨다.


나는 제본을 마치고 박 의원에게 전달하려고 회의장으로 갔지만 그는 아직 출근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카톡으로 사무실 책상에 올려놓으면 될지 물었다.

자료를 올려두고 한숨 돌리려는 찰나, 핸드폰으로 박 의원에게 전화가 왔다.


“네, 의원님”

“제가 지금 늦어서 택시 타고 가고 있는데요.. 궁금한 게 있어서요.”

“네. 말씀하세요.”

“자료 정리하시면서 뭐가 문제라고 생각하셨나요?”

“네?”


자료가 왔을 때 어떤 서류들이 오고 갔는지 대략 살펴보긴 했지만 꼼꼼히 보지는 못했다.

개발 관련 용역 기간이 3개월 밖에 안 되는데 1개월 만에 끝난 게 너무 짧았다고 말할까 하다가 지금 통화가 녹취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말했다가 함정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위험을 피하려던 나는 결국 이렇게 답변하고 말았다.


“의원님, 죄송한데 제가 도시개발 과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데다 서류로만 봤을 뿐,

실제 여기 사람들 의견을 들어본 적도 없어서 뭐라 의견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아무 생각이나 괜찮아요.

지원관님이 공문이랑 자료 보고 아무 문제없다고 느끼셨다고 하면 제가 질문 안 하면 되죠.


거짓말! 나는 속으로 외쳤다.

분명 오늘 회의에서 어떤 질문을 할지 다 생각해 놓고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떠보려는 수작이 분명하다.

나는 거듭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날 오후, 우리 팀 회의가 있었다.

박 의원은 팀장님께 지원관이 정책 논의 파트너가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아무 의견도 없으면 누구와 이야기하겠냐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나와 통화가 끝나자마자 정하윤 지원관에게 자신이 오늘 회의에서 질문할 리스트를

카톡으로 보내서 출력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에게 일은 시키지만 공식석상에서 어떤 질문을 할지, 알려주기 싫었던 게 아닐까?

아니면 급하게 일을 주문하고 못하면 화를 내려했는데 너무 빨리 마무리하니까 다른 것으로 시비를 걸었던 걸까? 좀 생각해 보고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고 말했어야 되나?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박 의원이 왜 그랬는지 답은 끝끝내 알 수가 없었다.

회의에서 정하윤 지원관은 원래 시청은 정해진 일을 하는 곳이지만

의회는 의원들이 그때그때 시키는 일을 빠르게 해야 하는 곳이며

본인은 항상 그렇게 일해와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박 의원은 도시공사의 개발 업무와 관련해서 나 몰래 정 지원관에게도 동일한 업무를 지시한 다음, 나와 그녀가 가져온 자료들을 비교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도시계획을 전공한 그녀가 나보다 일을 더 잘할 수밖에 없었고 나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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