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가수 이적 씨가 한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비가 와도 우산을 가지고 나와 주지 않았는데, 그게 서운하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우산이 없는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비를 맞으면서 놀았던 일이 즐거웠다고.
그 기사 밑에 '아마 평소에 무한한 사랑을 받아서 이런 일들이 서운하지 않았을 거라'는 댓글을 보았다.
아, 그래서 나는 서운했구나.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정의 말을 듣고 싶었다는 것을 육아서를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우리 엄마는 소리치고 야단치지 않았다. 쌀쌀맞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따뜻하지도 않다.
우산을 안 가지고 온 날, 비가 오면 의례 우리 엄마는 안 오신다는 걸 알기에 신발주머니를 머리에 올리고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다 젖은 어린아이를 씻으라고 하지도 않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하지도 않아서, 나는 머리도 감지 않은 채 티브이를 보고 있다가 그 옷 그대로 잠들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 옷을 그대로 입고 학교에 갔던 날도 많았다. 당시에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못 느꼈는데, 내가 아이를 키워보니 무척이나 이상한 일이었음을 느끼면서 어릴 적 기억이 소환되곤 한다.
나의 어릴 때 상처가 아이를 키우며 드러나는 것이 괴롭다.
고등학교 시절에 과외는커녕 학원도 다녀보지 못한 나는 한 달에 5만 원 하는 독서실에 보내달라고 했다. 집에서 공부하라는 말만 몇 달을 들었는데, 독서실 주인아줌마가 성당에 다니시는 아는 분이라서 엄마는 나를 독서실에 보내 주셨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그 아줌마와의 친분 때문에 독서실비를 내주셨을 때 좋기보다는 조금 서운했다.
어느 날 토요일 하교 후에 잠깐 낮잠을 자고 저녁 무렵 독서실로 향할 때 "지랄 지랄 개지랄 다 떨고 독서실 보내 달라더니 낮잠이나 처자고!"라는 독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더 어릴 때는 피아노 학원을 유일하게 다녀봤는데, 어느 날은 "피아노 선생님이 너는 소질이 없대. 그만 다녀라."라는 말 때문에 나는 지금도 악기를 다루는 일은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약간의 거부감이 느껴진다.
그래도 어떤 친구들이 자기 엄마에게 이런저런 욕을 듣고 지낸다는 것을 알았을 때 꽤나 충격적이었다. 우리 엄마는 그런 욕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교양 있고, 친절하시다.
"아녜스 씨 딸이라면 볼 것도 없네. 엄마가 그렇게 좋으신데 딸도 당연히 훌륭하겠지."
성당에 가면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아줌마들에게는 참 좋은 분이셨다. 우리에게 줄 간식은 만들 시간이 없었어도, 성당에 가지고 갈 간식은 한 솥씩 해서 단 한 개도 남겨두지 않고 가지고 가셨으니까.
항상 성당일을 하느라고 우리는 뒷전이었고, 성당 사람들과 함께 항상 뭔가를 하시느라, 일하시던 아빠보다 더 바빴던 엄마였다. 평일에도 집에 계실 때보다 안 계실 때가 많았고, 주말에는 성당 때문에 늘 바빴다.
어쩌면 모태신앙이었던 내가 지금은 성당에 발길을 끊은 것은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종교에 쏟는 엄마를 보고 자랐던 영향도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엄마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낀다는 글을 쓰는 자체가 또 다른 죄책감을 들게 한다. 나를 대놓고 학대하지 않았던 엄마를 욕하는 것만 같아서 배은망덕하고 못돼 먹은 사람 같다.
간섭도 하지 않았고, 잔소리도 없었다. 덩달아 딱히 관심도 없었던 것 같다. 엄마에게 받은 상처는 주로 말 때문이었다.
"저거 저거 못돼 쳐 먹었어."
"아이고 네가 잘못했네."
"너는 참 별나. 흐린 날을 좋아하는 거 보면 마음이 음침한가 봐."
"말도 안 하고 저거 맨날 응큼해."
이런 말들을 직접적으로 할 때도 있었고, 옆에서 내가 듣는데도 다른 사람들에게 놀리듯이 깎아내리는 말들을 했다. 아이를 비웃음거리로 만들면서 웃어대던 엄마의 얼굴이 가끔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엄마와의 다정한 한 때, 엄마에 대한 애틋함, 그리움들을 노래한 에세이들이 그렇게도 공감이 가지 않는다. 그런 글들을 읽다 보면 정말 그렇다고? 엄마랑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고? 엄마랑 이런 걸 한다고? 에이 말도 안 돼, 하게 된다.
하지만 거짓이 아닐 테지. 그런 모녀관계도 분명 있을 테다. 다만 나는 공감이 안될 뿐이다.
그렇게 나는 아들보다는 딸과의 관계가 유독 힘든 엄마가 되었다. 올해 열 살이 된 딸은 나와 상극이다.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들었던 상처되는 말을 아이에게 던지고서 밤새 울던 날들이 있었다.
엄마를 떠올리면 느껴지는 양가감정이 괴롭다. 차가웠던 무관심도, 그러나 자식을 향한 날 선 애정도 그 안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육아서를 읽으면 눈물이 난다.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 읽는 육아서에는 어린 시절 나를 위로하는 글귀들이 가득하다.
가치와 사랑의 말은 들어보지 못했어도 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게 너무나도 어렵기에, 다시 엄마를 원망하면서 또 엄마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같이 느낀다.
아이를 키우며 엄마를 떠올리고 원망하다가 불쌍하다.
내가 불쌍하고 엄마도 불쌍하다. 그리고 내 딸도 불쌍해진다.
모두가 불쌍해서 육아서를 읽으면 자꾸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