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시골로 가신건 우연이 아니다. 그는 약 40년간 몸담았던 직장에서 퇴직하기 5년 전부터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 농사도 짓지 않으시는 분이 컴퓨터로 매일 농작물이나 농기계 사용법에 대한 블로그를 찾아보실 때는 텃밭정도 가꿀 줄 알았다.
퇴직을 앞두고 세 달 전부터 아빠와 엄마는 임장을 다니기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살고 있는 도시에서 가까운 시골부터 다니셨지만 사실 수도권에서 더 멀어질수록 집값이 내려가는 건 당연하니까, 그의 충청도행은 예견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직장에 다닐 때 그는 주말에 한 번씩 수건을 어깨에 두르고 셀프 염색약을 머리에 가지런히 바르고 나오셔서 텔레비전 앞에 구부정히 앉아계셨다. 그의 머리는 늘 검은색이었는데, 염색약에 가려진 진짜 머리색깔을 알게 된 건 그가 시골로 내려가고부터였다.
더 이상 염색을 하지 않은 그의 머리는 새하얗다. 그 새하얀 머리카락을 숨기느라 그간 힘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바지런하게 미용실에 들러서 머리를 볶고 염색을 하는 엄마와는 대조적이다.
그러면서 나는 어떨까 생각해 본다. 흰머리가 내 정수리를 뒤덮을 때 나는 그걸 그냥 둘지, 까맣게 염색을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아빠는 농사에 제법 소질이 있으시다. 어쩌면 우리가 모두 예상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한 번 하면 뭐든지 잘하는 편이니까.
텃밭보다는 조금 넓지만 그렇다고 농부라고 칭하기에는 귀여운 정도의 밭을 소유하고 있다. 닭장 안에서는 매일 달걀이 만들어진다. 자기가 낳은 알을 매일 가져가는 사람들을 보는 닭의 심경 따위는 내 마음에서 조금 밀쳐뒀다. 닭의 마음까지 헤아리기에는 나도 현생이 녹록지는 않아서 말이다. 그리고 내 새끼들이 닭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풀을 주는 걸 좋아하니까. 내 새끼를 위해 닭의 새끼에 대한 마음은 접어둔다.
얼마 전에는 감자 한 박스가 택배로 배송되었다. 제철감자는 쫀득쫀득하고 맛있지만, 한 박스는 늘 너무하다. 우리 집 식구들은 누구도 삶은 감자는 먹지 않기 때문에, 결국 감자요리는 채 썰어서 에어프라이어에 기름 살짝 넣어 감자튀김을 만든다. 이게 우리 집 아이들 입맛에는 가장 잘 맞지만 이미 학교 앞 떡볶이 집의 양념감자 맛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엄마표 감자튀김이 썩 맛있지는 않다.
감자가 들어간 요리를 생각한다. 감자볶음, 된장찌개, 카레. 더이상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망했다.
그래서 이런 반찬들을 돌리다가 감자에 싹이 나고 만다. 그럼 또 아빠가 농사짓는 모습이 떠올라서 싹이 난 부분을 도려내고 어떻게든 먹는다. 꾸역꾸역.
지난달에 집에 내려갔을 때 양파 한 망을 주셨다. 잘 말려서 먹으라고 했는데 며칠을 베란다에 그대로 방치해 뒀다. 양파 한 망은 너무하니까, 흙이 떨어지는 양파망을 째려보다가 몇 알 골라서 양파 장아찌를 했다.
내 평생 첫 양파 장아찌다. 레시피를 찾아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양파장아찌는 맛있었다.
그래도 양파는 아직 너무 많이 남았다.
새언니는 뭐가 떨어지면 전화해서 다 먹었으니 달라고 말한다. 새언니의 그런 모습이 좋다. 나는 단 한 번도 엄마에게 뭐가 없으니 달라고 말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또 엄마는 나의 그런 모습이 서운하다.
우리 집에서 뭐가 잘 떨어지지도 않고, 그나마 참기름 들기름을 많이 먹는 편이지만 그건 엄마도 방앗간에서 만들어 오는 거니까, 나는 한살림에서 사 먹고 만다.
엄마가 보내주는 참기름 들기름은 듬뿍듬뿍 써대는데, 한살림에서 산 건 아껴 쓴다. 비싸서 그렇다. 그걸 만들기 위해서 엄마랑 아빠가 어떻게 했는지 생각하면 그게 더 비싼 건데 당장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 아까워서 그렇다.
아빠가 주신 양파 한 망은 여전히 그대로 있는 것 같다. 분명 양파를 많이 깠는데, 장아찌는 또 손이 자주 안 간다. 감자도 왜 하나도 줄지 않는 거지.
나는 쟁여놓는 걸 싫어하는데, 아빠의 택배는 그래서 부담스럽다. 나의 베란다가 지저분해지니까, 감자와 양파에 싹이 나니까.
그 싹은 아빠의 땀이고, 택배를 부치려면 집에서 차로 20분도 넘게 달려가야 하는데, 두 노인이 그런 걸 끙끙거리면서 박스포장을 하고 택배를 보냈을 걸 떠올리는 게 썩 즐겁지가 않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걸 먹어치우려고 평생 안 해본 장아찌도 담가보지만 양파 한 망을 다 먹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도 이 택배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장담할 수 없어서, 그 생각을 하면 목이 메이지만, 제2의 인생을 농부의 삶으로 살아가는 아빠가 자랑스러워서, 목이 메여도 먹는다. 먹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