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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Jun 29. 2023

이제 남편에게 묻지 않는다

남편에게 많이 의지했다. 그는 나와 동갑이지만 우물 안 개구리 같던 나의 삶보다 치열한 이십 대를 보냈기에 그가 삶의 지혜를 더 많이 장착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렇다. 그건 모두 사랑이라는 이름의 콩깍지였고, 착각이었다.

물론 남편도 잘하는 게 많다. 나보다 성숙한 면도 많고 말이다. 대출을 알아보거나 집을 구하는 등의 아주 큰 일은 그가 주도적으로 한다. 하지만 소소한 집안의 작은 일들은 더 이상 그에게 묻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내 마음대로 하고 보니 마음이 아주 후련하다.


남편은 건설회사에 다닌다. 일명 노가다에 대해 아주 박식하다. 그래서 집안의 문고리가 고장 나거나 붙박이장이 잘 맞지 않거나, 선풍기가 고장 나면 그의 손을 거치게 된다. 뚝딱뚝딱 몇 번 만에 고장 난 문고리는 정상작동을 하곤 한다.

이사 올 때 도배를 새로 했는데, 아는 사장님에게 부탁을 해서 저렴하게 해달라고 했단다. 의기양양한 그의 모습과는 다르게 2년 차 도배지는 너덜너덜해졌다. 다행인지 거실과 안방은 장마철이 아니면 볼 만한데, (장마철에는 벽지가 떨어질 것처럼 운다. 그걸 보면 나도 울고 싶다.) 작은 방 벽지는 이미 다 떨어져서 그걸 볼 때마다 딱풀로 붙이곤 한다. 남편에게 불만을 얘기하면 아무 소리도 안 한다. 그분들께 제대로 임금을 지급한 건지 사실 의문이다. 돈 받고 일했다면 이렇게 해놓을 수가 없는 건데 말이다.


창문은 롤방충망이 설치된 구조인데 오래된 집이라서 그런지 방충망이 많이 삭아있었다. 이사 오고 일 년쯤 후 어느 날 일꾼들이 들이닥치더니 거실 쪽 롤방충망 4개를 새로 끼워주고 갔다. 이번에도 남편이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아주 저렴하게 했다며 뿌듯해했다. 하지만 일 년 후 작은 방의 롤방충망은 아랫부분부터 서서히 분리가 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롤이 위로 말려 올라가 버려서 방충망이 없는 창문이 되고 말았다. 작년 무더위에도 그 방은 창문을 열 수 없었다. 다행히 그곳에서 생활하는 일이 거의 없어서 그냥 두었는데, 올여름에는 창문을 너무 열고 싶어서, 남편에게 말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삭아서 흥부네 집처럼 보수해 놓은 다른 쪽 방충망들을 보시더니 사장님은 다 교체하라고 나에게 영업을 하셨다. 호구 중에 상 호구인 나는 아저씨의 상술에 말려들었고, 전체 방충망을 다 교체하는 짓을 벌였지만, 교체하고 보니 이토록 깨끗하고 좋을 수가 없다.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휴직자 신세지만 당당하게 남편 돈을 쓰고 보고를 한다.

"오늘 방충망 교체 24만 원 들었어."

짠돌이 남편이지만 역시 그는 나보다 성숙하다.

"잘했네." 하고 마니까.


에어컨의 계절이 돌아오다 보니 에어컨 청소에 대한 생각이 슬금슬금 든다. 남편은 에어컨 청소가 굳이 필요한가 하며 자기가 그냥 필터 청소만 쓱쓱 하고 켜곤 했다. 그러기를 올해로 이사 온 지 4년째다. 엊그제 개시한 에어컨에서는 꿈꿈한 냄새, 시큼한 냄새, 웬 반찬 냄새들이 새어 나온다.

나는 다음날 바로 에어컨 청소 업체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했다. 지금이 제일 바쁠 때라 그런지 예약이 일주일 후로 잡혔다. 일주일 동안 강제 에어컨 사용 금지령을 내리고, 습기 머금은 거실에서 선풍기만 튼 채 아이들과 나는 그렇게 일주일을 버틴다.

그는 주말부부이기에 집안의 작은 일들에 딱히 관심이 없다. 우리가 얼마나 곤란한지, 매일매일 쓸고 닦아야 하는 곳들이 얼마나 많은지, 본인이 화장실에서 놓친 도마뱀이 새벽마다 나타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사는지,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도 눈이 스르륵 감겨가는 10시 30분에 영상통화를 거는 건 무슨 심뽀일까? 수신거절을 눌러버리거나, 전화를 받아서 "다 잔다."말하고 끊는 일도 한두 번이지, 대체 아이들이 몇 시에 잔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잠을 깨워버린 대가는 잔혹하다. 욕을 욕을 하고 이렇게 글까지 쓰고 있으니.

그러나 저러나 남편을 떠올리다 보니, 심뽀는 모르겠지만 심성은 나쁘지 않으니 데리고 사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에어컨 청소를 예약했고, 한대당 6만 원에 해준다고 했더니, 역시나 이번에도 뭔가 말하려다가 "아니야, 잘했다고."하고 마니까 말이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이렇게 거금을 써버리면 부부싸움 각이던데.

우리가 부부싸움을 거의 하지 않는 이유는 부처님처럼 넓은 나의 아량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숨기고 "알았다. 잘했다."로 모든 일을 결론내기 때문은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아니지, 진짜 내가 잘해서 잘했다고 하는 거겠지. 나는 또 우겨본다.



일 년 만에 열린 창문처럼 십 년 동안 같이 살아온 부부는 시원한 관계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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