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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Aug 01. 2023

왜 뭘 자꾸 주는 걸까

"일호 운동화 있어?"

전화를 받자마자 안부인사도 없이 용건부터 말하는 건, 쓸데없는 시간낭비를 줄여주니 좋아해야 하는 건지. 사실 이런 식으로 전화통화를 해본 사람은 처음이라 조금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다.

"네 있어요."


얼마 전에는 연락도 없이 택배상자가 도착했다. 이호의 옷가지들과 새 크록스였다.

"이호야 고모가 00형아가 입던 옷이랑 새 크록스 보내주셨네."

그때 내가 감사 전화를 드렸던가, 깜빡 잊고 전화를 안 한 거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어제 일호 신발을 사주겠다는 전화를 받고서야 떠올랐다. 아뿔싸, 감사전화를 안 한 거 같은데, 이런 젠장.


우리 집에는 그녀가 보내준 옷가지들이 넘쳐난다. 그녀는 바로 남편의 누나, 아이들의 고모, 나의 시누이인데, 주로 시조카가 입던 옷을 물려주신다.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 아들은 너무나도 옷이 풍족하다.

게다가 고모부가 입으시던 옷을 남편에게도 물려(?) 주시는데 나는 성인들끼리 입던 옷을 물려(?) 준다는 게 조금은 이상하지만 남편은 두말 않고 그걸 받아서 잘 입곤 하니까 나로서도 별로 할 말은 없다.


남편과의 결혼식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신혼집에 가보니 한편에 짐이 가득 있었다.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가게 된 나를 위해 누나가 입던 비키니와 해변룩이 그곳에 잔뜩 있었다. 나는 그중에 마음에 드는 비키니 한 벌과 그 위에 걸치기 좋은 옷을 두세 벌 골라 여행가방에 넣었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처음으로 가는 하와이라서 나도 내 취향에 맞는 수영복을 사고 싶었다.

그날 누나가 신혼 때 집들이를 하면서 한 번 사용했던 그릇과 접시세트도 함께 우리 집으로 보내졌다. 그 꽃무늬 접시는 아직도 우리 집에서 사용 중이다. 나도 북유럽식 접시세트를 언젠가는 살 거라고 마음만 먹다가 십 년이 흘렀다. 멀쩡한 접시세트를 차마 버릴 수가 없는 나의 궁상함 덕분이다.


그 이후로도 시댁에 갈 때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나에게 입던 옷을 주시곤 하셨다. 어딘가에서 얻어오신 실내복이라던지, 아렛에서 산 청바지라던지 말이다.

이런 일들이 하나둘씩 쌓이자 나는 이제 감사한 마음보다는 입던 옷이나 받아 입는 처량한 마음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청바지는 거의 갈 때마다 주시기에 나는 지금 청바지 부자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그걸 꼭 눈앞에서 입어봐야 한다는 것. 처음에는 시어머니가 주시면서 입어보라시기에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는데 방까지 따라 들어오셔서 갈아입는 걸 굳이 감상하시는 모습에 당혹스러웠다. 지금은 뭐 그러려니 한다.


우리 집에 거대한 곰 한 마리가 들어오던 날, 나는 아이들보다도 더 큰 곰인형을 보고 "아니에요. 안 가져갈래요."라고 분명히 밝혔으나 그건 어느새 우리 차 트렁크에 실려있었다.

"이거 동네에서 누가 준건데 우리집에도 있어. 두개는 필요없잖아."

아이들은 곰 인형을 좋아했다. 딱 하루만.

이틀째부터는 쳐다보지도 않던 곰인형은 우리 집 처치곤란 1호가 되었다. 일 년쯤 거실 구석에 처박혀있던 곰인형은 아파트에서 솜인형, 이불, 베개 등을 무료로 수거해 간다는 공고문이 붙었던 어느 날 드디어 우리 집을 떠날 수 있었다.


그래도 딸아이의 옷은 다른 여자아이가 입던 옷을 잘 모아서 주시기도 하지만 대체로 새 옷을 사주신다. 아들만 하나 있는 시누이는 주변에 여자아이들이 잘 없기도 하고, 딸이 갖고 싶다며 입버릇처럼 "우리 일호는 고모 딸이기도 하지?"라며 "고모가 예쁜 거 다 사줄게." 하시니 나는 얻어 입히고 얻어 입는 주제에 감사하는 마음만 장착하면 될 뿐이다.


얼마 전 "팬티, 아무리 빨아도 변은 묻어있다."라는 종류의 기사를 읽고 나서 이제 시조카가 입던 팬티를 아들에게 입히지는 않는다. 팬티하나, 양말하나까지 다 보내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 기사가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들이 커가며 돈 들어갈 곳도 많은데, 의복비 부담을 줄여주시는 고모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자꾸만 비뚤어진 마음이 생기는 이유가 뭘까, 아직도 성숙하지 못하다.

사실 바로 몇 시간 전에 딸아이가 운동화 밑창이 다 닳아서 물 있는 곳에서는 자꾸 미끄러진다는 말을 했는데 마침 고모에게 운동화를 사주겠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신을만해서 내년까지 신기려고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하고 말았다.

뭔가를 주는데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 그녀에게서 기쁨을 빼앗은 건 아닌가 살짝 쫄았지만 나도 내 마음이 편한 게 우선이라서 말이다.


사람마다 기쁨을 느끼는 포인트가 다르고 짜증을 느끼는 포인트도 다르다. 나눠주는 걸 좋아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받기만 하면 그만인데, 나는 누군가에게 받기만 하는 게 참 불편한 사람이라는 게 이 문제의 포인트다.

내 마음 같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 결혼생활이고, 그곳에서는 불편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지만 차마 말한마디 하지 못하는 최고의 사회생활이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렇게 뭘 주는 시누이가 있다니 행복한 줄 알라고.

그러고 보면 나는 너무 무심한 시누이였나 생각이 들어서 우리 새언니는 서운하려나? 또 한번 쫄았다가도, 시누이와 올케는 그렇게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는 게 정설이니까 괜찮다고 또 합리화를 한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고 누가 그랬더라. 사람은 다 다르고 나는 내 방식이 좋으니까, 지금처럼 조금은 불편하게 약간은 재수 없게 계속 살고싶다.



사진설명 : 자기 키보다 큰 곰인형을 버리기 위해 끌고 가는 여덟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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