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책장 Aug 06. 2023

700ml 텀블러

물을 못 마시는 딸이 있다. 그리고 물을 잘 마시는 아들도 있다.

마음 같아서는 여자아이가 물을 좀 잘 마셨으면 좋겠는데, 외모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으면서도, 물이란 걸 적절히 마시면 피부가 좋아진다는 말을 백만 번쯤 말해도 마음에 와닿는 게 없는 모양이라 여전히 잘 마시지 않는다.

늘 그렇지만 남녀노소, 누가 시킨다고 그게 잘 될 리가 없다. 


나는 물을 좋아한다. 생수도 벌컥벌컥 잘 마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부가 그리 좋지는 않다. 아마 스무 살 초반 성인여드름의 습격을 받기 전에 그런 습관이 들었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후회가 있지만, 후회해 봤자 소용은 없으니까 그냥 지금이라도 열심히 마신다.

마시다 보면 좋아지는 게 또 물이란 녀석이다. 하지만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다 보니 하루에 물을 몇 잔 마셨는지 세고 있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텀블러를 샀다. 500ml는 너무 작은 느낌이라 700ml로 샀는데 처음에는 너무 큰가 싶었지만 쓰다 보니 나에게 딱 적당했다. 여기에 하루 3번 물이나 차를 채워 마시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목표라고 하기에는 너무 쉽게 마셔진다. 특히 책을 읽을 때 옆에 놓으면 습관처럼 마시게 되어 아직 점심밖에 먹지 않았는데 하루치 목표량을 다 채우기도 한다. 그런 날은 이제 좀 물을 적게 마시려고 노력해야 해서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아이를 낳고 모유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물을 많이 마셔야 했다. 그때 남편이 선물로 텀블러 하나를 사줬는데, 나중에 보니 남들은 출산선물로 명품백이나 티파니에서 목걸이나 반지 따위를 사준다는 말을 듣고, 나는 텀블러를 받았다고 어디 가서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고 하면 너무 정신승리인가.

이상하게 나는 평범한 말을 하는데도 내 개그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가끔 만나고는 한다. 특히 재수학원에 다닐 때 일 년 동안 내 짝꿍이었던 지선이는 나를 '세상에서 제일 웃긴 언니'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선이 같은 사람을 자주 못 만나는 게 문제다.

남편과는 소개팅 어플로 만나게 되었다. 지금 소개팅 어플이라고 하면 왠지 범죄의 온상이라던지, 퇴폐적인 목적을 가진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초창기의 소개팅 어플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거기서 만나 결혼한 커플만 내 주변에 나포함, 4커플이나 된다. (지금도 이혼하지 않고 잘 살고 있다.)

어플에는 자기소개를 써야 했는데, 나는 진심을 담아 원하는 것에 "남북통일과 기아, 난민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라고 적어놓았다. 그걸 보고 지금의 남편은 나를 꽤 웃긴 여자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와 만난 건데, 알고 보니 하나도 웃기지 않은 여자라서 당황스러웠단다. 그래선지 요즘은 서로 대화가 별로 없다.

나의 개그는 시어머니에게 잘 통했다.(과거형이다.) 사실 개그를 친 게 아닌데, 나의 말에 깔깔 웃는 사람을 보면 나도 역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남을 웃기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법이라 그들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나는 더 웃긴 말을 하려고 노력하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나의 개그가 빛을 잃어버리게 되기도 한다. 


지금은 지선이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 회계사가 된 지선이는 이제 진중하고 진지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갈 것만 같다.  

시어머니와는 만나면 여전히 대화를 많이 한다. 나보고 "웃기는 애네." 하실 때 이게 순수하게 재미있다는 뜻인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작작하라는 소린지 가끔은 헷갈리때가 있기는 하지만 십 년 차 고부관계치고는 나쁜 관계는 아니다. 

모든 관계는 사실 나만 잘하면 된다. 이걸 마흔이 넘고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인 후에 행동할지는 내가 결정하는 거였다. 지선이와 꾸준히 연락할 기회는 내가 걷어차버린 것이었고, 시어머니 말을 고깝게 받아들이게 된 것도 내가 베베 꼬였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개그에 대한 약간의 갈망이 있는 것처럼 하루종일 물을 마시면서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 그런 날이 있다. 요즘이 조금 그런 시기인데,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내가 참 사람들에게 무심하고 관용 없이 지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되는 그런 날 말이다.

누가 시킨다고 뭔가를 하는 건 아마 세 살 이후로는 거의 없는 일이 아닐까. 이제 큰 아이는 공부 루틴을 잡아줘야 할 나이라고 학습 전문가들이 그러니까 수학, 영어, 독서, 글쓰기 루틴을 만들어주고 있는데, 여기서 물 마시는 루틴까지 잡아주기에는 아무리 엄마라도 너무 심한 거 같아서 좀 알아서 하면 안 될까 싶다. 그러다가도 어린이를 양육하면서 "알아서 하기"를 기대하면 절대로 안되며 이것은 또한 학습 방임이 되는 것이라는 말을 들어서 갈팡질팡한다. 엄마 나이 열 살이라도 아직도 너무 헤맨다.


사람의 취향은 잘 변하지 않는 것이라, 내가 텀블러를 사고 나서도 이게 핑크색이라는 것을 깨닫고 후회를 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마흔이 넘은 아줌마가 핑크색을 들고 다니면 사람들이 욕할까 봐, 또는 주책바가지라고 속으로 생각할까 봐 좀 점잖은 색을 고르려고 노력하며 분홍색 옷이나 소품들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고 다녔는데, 결국 핑크 텀블러를 고른 후에 나는 지금도 약간의 후회와 커다란 만족감을 느낀다. 

남의눈을 의식하지 말자고 말하면서 여전히 남의눈을 의식하는 내가 우습기도 하지만 나는 핑크가 좋으니까 핫핑크 아닌 게 어디냐며 위로를 던져본다.

시어머니와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는 게 어디가 어떠냐며 그건 내 취향이라고 우기는 것처럼, 자식도 취향껏 키우는 거지 정답이 어딨냐고 외치고 싶다. 그래도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욕망이 매일매일 부글부글 끓는 건 너무 모순이다.


나는 여전히도 남북통일과 기아와 난민 없는 세계평화를 꿈꾼다. 그걸 우습게 생각하는 남편과 십 년을 살면서도 여전히 남북통일과 굶주리지 않는 어린이가 없는 세상은 요원하지만 나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면 너무 웃긴가. 아마 여든이나 아흔이 되어 내가 살아있더라도 나는 원하는 걸 다 이루었으니 갈증 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고 만족하지는 못할 것 같다. 

늘 무엇인가 채우고 싶은 욕망이라는 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있어야, 또 치열하게 살 수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개그와 평화와 성공과 나의 피부가 좋아지기를 바라는 건 너무 꿈이 큰가.

그냥 700ml 텀블러에 물과 욕망을 꽉꽉 담아 하루치 목표량을 달성하다 보면 앞으로 또 십 년 후쯤에는 육아든 뭐든 뭐라도 하나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 않을까 기대로운 하루를 시작할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 뭘 자꾸 주는 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