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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 Aug 23. 2023

엄마, 할머니 싫어해?

"이제 너희들의 공부일기장은... 크흡... 나무랄 데가 없을 만큼... 크허헝... 훌륭..."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빨리 재우고 할 일이 있어서, 오늘도 열심히 잠자리 독서를 하고 있다. 등장인물이 울면서 말하는 장면을 진짜 울듯이 크허허헝 하면서 읽어주니 아이들은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좋았다. 이런 시간이.

그때 거실에서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첫째는 아빠다! 를 외치며 뛰쳐나갔다. 애들 책 읽어줄 때 전화하는 게 못마땅했는데, 또 이 시간에 전화군, 이라는 소리를 속으로만 내뱉으며 책장이 덮이지 않게 살짝 뒤집어서 침대에 내려두었다.

"계속 읽어줘!"

둘째는 계속 읽으라며 소리를 지르고 밖으로 나간 큰애는 "할머니?"라고 했다.


나는 거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친정 엄마였다.

아, 맞다. 오늘 저녁 8시에서 10시 사이에 00 택배에서 옥수수가 도착한다는 메시지를 받았었다.

"여보세요. 옥수수 도착한다고 택배 문자는 받았는데 아직 안 도..."

내 말을 자르며 엄마는 소리쳤다.

"아빠한테 문자 들어왔다는데 도착했다고? 빨리 내다봐. 그거 지금 삶아서 냉동실에 넣어 놓고 자라."

"어? 지금 애들 재우고 있는데? 내일 아침에 하면 안 돼?"

"안돼. 어제 딴 거라 아직은 괜찮은데 오늘 해야 맛있어. 내일 하면 맛이 없지. 그리고 깻잎김치도 넣었으니까 그거 꼭 냉장고에 넣어야 해. 안 그러면 쉬니까."

"아.. 알겠어."

현관문을 열어보았지만 택배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택배 아직 안 왔는데? 잠깐만."

나는 택배 기사님께 문자 온 게 있는지 확인했다.

10분 전에 "안녕하세요. 00 택배입니다. 00 택배가 30분 후에 배송예정입니다."라는 문자가 와있었다.

"아 여기 기사님은 완료 문자는 안 보내시고 30분 전에 문자 보내시는데 아직 도착할 시간 안 됐네. 20분 후에 도착이래."

"그럴 리가 없는데! 아빠한테 배송완료 문자가 왔다니까! 큰일 났네. 빨리 나가서 찾아봐."

"어? 찾아보라고? 어디서?"

"다른 집에 갔나 보다. 빨리 나가서 찾아봐."

"아니야. 여기 택배기사님 30분 후에 도착이라고 했고, 지금 밖에 비가 와서 아마 좀 늦을 거야."

"큰일 났네. 깻잎 냉장고에 안 넣으면 맛없어져."

"오겠지. 알겠어요. 애들 책 읽고 재워야 하니까. 도착하면 삶아놓고 잘게."

사실 나는 오늘 밤에 옥수수를 삶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던 참이었다. 벌써 밤 열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나는 늘 그렇듯 애들 재우다가 잠들어버리니까. 하지만 엄마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엄마가 하라는 데로 하겠다고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알겠어. 근데 택배가 와야 하지. 아직 택배가 안 왔으니까 해놓고 잔다고."

"야야, 밖에 나가서 찾아봐."

"알겠다고."

전화를 끊고 화가 났다. 그래서 내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나 보다.

그때 둘째가 나를 올려다보며  "엄마 할머니 싫어해?"라고 물었다.




솔직히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택배 기사님도 늦을 수 있고, 아빠에게 간 문자는 회사의 시스템 때문이겠지. 아니면 기사님이 먼저 누르셨거나. 바쁘기 전에 미리 누를 수도 있지 않나? 그게 진짜 완료되고 나서 보낼 수도 있고, 직전에 보낼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잖아. 택배기사님이 얼마나 바쁜데, 그거 완료 문자가 딱 떨어지게 막 그렇게 오고 그러는 거 아니잖아. 마켓컬리도, 쿠팡 로켓프레시도 오히려 늦은 시간이나 이른 시간에는 문자 안 보내려고 나중에 보내거나 미리 보내기도 하지 않나? 택배기사도 사람인데.


아아아악! 나는 세상 사람들을 모두 이해해 주는 척하는데, 단 한 사람 우리 엄마만은 그런 척하기도 힘겹다. (요즘은 남편도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에 속하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엄마를 향해서 화를 내고 나면 이렇게도 속이 좋지 않다. 게다가 오늘은 아이들도 느낄 정도로 내가 퉁명스럽게 말을 했다는 거니까.

애들 잠들면 나가서 찾아봐야지, 했는데. 결국 나는 잠이 들고 말았다.

꿈에서 나는 옥수수를 먹고 있었다.


퍼뜩 깨어나니 새벽 4시 30분. 매일 알람을 해놓고 자도 그 시간에 못 깨는데, 오늘은 알람이 울리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옥수수를 먹던 입맛의 씁쓸함이 남아있었다.

큰일 났다! 그놈의 깻잎김치!

나는 밖으로 나와 현관문을 열었다.

아빠가 보낸 커다란 스티로폼 상자가 어두운 복도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것도 집 앞이 아니라 엘리베이터에 더 가깝게. 아, 택배 기사님 바쁘셨구나.

이것 봐. 나는 또 상관도 없는 택배기사님은 안쓰러우면서 왜 엄마한테는 퉁명스럽게 말하는 걸까.

그리고 그걸 아이들이 느껴버렸다는 것에 또 자괴감을 느낀다.


안다. 이 더위에 70대 노인 둘이서 옥수수를 따고 차에 실어 읍내로 나와 택배를 부친다는 걸 안다. 깻잎을 따고 양념을 해서 한 장 한 장 그걸 묻힌다는 걸 안다. 엄마의 음식은 시골스럽고 투박하다. 그리고 나는 아직 투박한 게 못내 싫다. 그래도 새벽 5시, 옥수수를 삶았다. 봉지에 넣어 보낸 오이지와 깻잎김치는 봉지째 냉장고에 일단 넣는다. 일단 넣는 게 중요하다. 뭐든지 엄마가 하라는 건 일단 대답하고 봐야 편하다. 그리고 뒷일은 몰래, 그냥 내가 하고픈대로 해도 되더라. 그냥 트러블을 만들고 싶지 않다. 하지만 퉁명스러움은 숨기기가 어렵다.

이건 대화방식이 아니다. 모두에게 친절하면서 엄마에게 친절하지 못한 건 내 탓이 아니라고 우길 수 없는 문제다. 엄마에게 퉁명스럽게 말해서 반성을 하는 게 아니라 그 모습을 아이들에게 들켜서 반성을 하고 있다.

나는 좋은 딸이 아닌데,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다시 책을 읽어주고 침대에 눕힌다. 얼마 전 큰 아이가 "엄마는 언제부터 책을 읽었어? 누가 읽어준 거까지 해서. 나는 1살 때부터 엄마가 읽어줬지." 하고 질문인지 독백인지를 내뱉었다.

나는 엄마나 아빠가 책을 읽어준 기억이 없다. 국민학교 1학년때는 겨우겨우 한글을 떼느라고 책을 못읽었으니, 내 최초의 독서 기억은 국민학교 2학년 때였다. 고아소녀 캔디의 이야기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그래서 부모가 읽어준 독서의 기억이 어떤 건지 육아 전문가들이 아무리 말해도 잘 모르겠다. 그냥 좋다니까 계속 하지만 나는 읽어주는 사람이라 듣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지 정말 모르겠다.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 옳은 것을 할 뿐이이다. 옥수수를 내일 삶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렇게 할 거고, 엄마에게는 저녁에 삶았다고 말하면 모두가 완벽해진다.


"엄마, 할머니 싫어해?"에 대한 대답은 하지 못했다. 아이의 질문은 당황스러웠고, "아니 택배가 너무 늦게 와서 짜증이 나지. 자야 하는데."라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래, 나는 옥수수가 너무 게 와서 짜증이 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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