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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 Aug 21. 2023

출산한 나에게 엄마는 소리를 질렀지

왜 그랬을까,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심장이 벌렁거린다.

그리고 그 생각이 한 번 떠오르면 며칠이 가도록 기분이 좋지 않다.


그래, 나는 좀 살갑지 못한 사람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살갑지 못하다. 남편에게도, 자식들에게도 말이다. 그래도 그 애들이 아주 작은 아기였을 때는 나도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노래도 부르고 매일 안아줬는데, 좀 컸다고 안기는 것도 힘겹다. 아직 어린이인데, 안길 때 징그러워서 손으로 조금 그 애를 밀면서도 애가 상처받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한다.

그 애를 낳고 조리원에 2주 있다가 집에 왔다. 나는 굳이 도와달라는 말을 한 적은 없는데, 엄마가 와서 일주일만 있다 간다고 하셨다. 엄마와 같이 지내는 일상이 버겁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싫었지만 그러라고 했다. 사실 혼자서 아기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낳고 보니 안될 것 같았다. 너무 작았고, 너무 소중했다.


엄마는 아기를 안아주기만 했다. 기저귀를 간다거나 목욕을 시키는 건 결국 내 몫이었고, 엄마는 내 밥을 챙겨주거나 청소를 해주는 일을 도맡으셨다.

아니 어쩌면 내가 엄마를 믿지 못해서 애를 맡기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기저귀를 갈 때면 아기가 불편해하는 것 같았고, 그 작은 애를 떨어트릴까 봐 엄마가 목욕을 시키는 건 더더구나 안될 일이었다.

그런 것부터 서운함이 쌓였을까?


그날도 나는 소파에 앉아서 수유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청소기를 밀기 시작했다. 돌돌돌 굴러가는 동그란 본체가 있는 그 옛날식 청소기. 나는 그 뒤꽁무니에서 나오는 바람은 냄새도 쿰쿰하고 미세먼지가 흘러나올 것만 같아 애기가 방에 있을 때 거실을 돌리고, 애기를 거실에 놓고 방을 돌리고 싶었는데, 엄마는 그렇게는 하지 않으셨다. 그냥 엄마가 하고 싶을 때 했다.

청소기에서 나오는 쿰쿰한 냄새들이 아기를 향해서 발사될 때 나는 투덜거리고 말았다. 감히 육아를 도와주러 온 엄마에게 말이다.

"청소기에서 먼지 나오잖아. 방향 좀 틀어줘."

엄마는 나를 한 번 째려보시고 나서 청소를 마저 마무리 한 뒤에 부엌으로 들어가서 뭔가를 도마에 탁탁 썰어댔다.

그리고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이 칼을 손에 들고 나를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애 낳은 게 그렇게 유세냐? 지랄지랄한다. 남들은 애 낳으면 친정엄마한테 고맙다고 한다는데 저년은 뭐가 저렇게 잘나서 저러는지 몰라. 나 내일 아침에 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저 말은 정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하는 말이었다. 그냥 크게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애기를 안고 있는 산후 3주 된 나에게. 그 손에 있는 칼을 나와 아기에게 집어던질까 봐 무서웠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합리화를 잘하기 때문에, 나 역시도 잘못이 없는 거 같다고 말이다.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나는 그 후로도 지금까지 아이를 친정에 맡겨 본 적이 없다. 그럴 수 있는 물리적인 거리도 아니고, 심리적인 거리는 더더욱 아니다.

엄마가 나에게 그랬던 건 무엇이었을까, 서운함이었을까, 출산 후 호르몬이 사람을 어떻게 지배하는지 몰랐을까. 그냥 모든 것이 원망스럽다. 나는 아직도 그래서 친정에 가야 할 때면 명절을 앞둔 며느리처럼 몸이 아프고 만다.


그리고 그때 내가 소중히 붙들던 아이는 이제 열 살이 되었다. 아직도 어린애처럼 나에게 안기고 내 칭찬을 갈구한다. 나는 엄마처럼 아이를 키우지 않을 거야,라는 다짐이 무색하게 나는 아이에게 자주 소리를 지른다.

돌이켜보면 엄마는 나에게 자주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아주 가끔 한 번씩 폭발을 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 기억이 더 강렬하고 무서운 건지도 모르니까 자주 소리 지르는 나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미친 생각도 한다.

합리화의 끝판왕이다.


오늘은 아이의 필통에 오랜만에 쪽지를 넣어주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건 나의 반성문이기 때문이다. 내가 자꾸 무너져서 우리 엄마 같은 엄마의 말이 나왔을 때, 나는 자책과 반성을 한다.

그리고 또 반복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어쩌자고 아이를 낳았을까, 나 같은 사람은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다.

하지만 이미 낳았으니 어쩔 수 없지. 나는 소리 지르지 않는 엄마가 되기 위해 내 속에 있는 어린이부터 보듬어준다. 내가 엄마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아이에게 해주면 뭐가 달라질까?

한심하고 애처로운 나의 반성문은 아이의 즐거움으로 자라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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