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 드디어 복직이다. 너무 좋다고 하면 조금 과장된 표현이고, 존나 좋다고 하면 너무 상스러운가.
올해는 내가 정말 싫어하는 많은 일들을 해낸 한 해다. 그 중의 한가지 엄마들과 관계 맺기를 나름 잘 해낸 것 같다.
교사와 학부모로 만나는 관계도 아이를 매개로 한 것이니 아이가 사라지면 우리 사이도 멀어지고 말지만, 엄마대 엄마로 만나는 관계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아이들끼리의 친밀함이 사라진다면 내가 그 엄마랑 말 섞을 일도 없다.
나는 그 흔한 조동모임도 없고, 어린이집, 유치원 엄마들과도 연락처를 주고받은 적이 없다. 그때는 워킹맘이었으니까 하원시간이 늦은 우리 아이와 같이 놀 친구도 없었고 말이다. 그래서 외로웠냐고 묻는다면 어이없이 쳐다봐줄 거다. 지금은 둘째 아이 친구 엄마들의 전화번호가 무려 7개나 저장되어 있다.
거의 8개월 동안 매일 만나는 사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분들의 성정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놀이터에서 만나는 1~2시간에 모든 것을 완벽히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종종 누구누구의 생일파티에서 4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다 보면 웬만큼 파악이 안 되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애 키우며 일하는 동안 절친들보다도 더 자주 만나는 동네 친구 엄마들.
큰애는 2학년 때 전학을 와서 자기들끼리 놀고 학원 가느라고 엄마들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생일파티도 엄마불참, 아이만 참여하는 형식으로 진행하니 세상에 마상에 너무 편하고 좋다. 2학년만 돼도 아이 생일파티에 안 가도 될 거라는 희망찬 생각이 나를 버티게 한다.
그러나 올해 입학한 둘째 아이는 골목대장 스타일이라 옆에서 지켜보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이 들지만, 내년에는 돌봄 교실에 묶어두고 퇴근할 때까지 그곳에서 온몸을 베베 꼴 아이를 생각을 하면 그것도 안쓰럽긴 하다.
말 그대로 천둥벌거숭이 둘째 아들은 극 내향형인 엄마를 놀이터 터줏대감으로 만들어 주었으니 아이 덕분에 못해본 것도 다 하고 좋아해야 하는 거겠지.
아이 친구 엄마 중에 앞에서 봐도, 뒤에서 봐도 애엄마로 보이지 않는 분이 계시다. 긴 생머리에 딱 붙는 청바지, 배꼽이 보일락 말락 한 크롭티를 입었는데 화룡점정은 그녀의 완벽한 풀메이크업이다. 한마디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큼함이 풍겨온다. 그녀가 다가오면 꽃향기가 나지만 그녀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매력을 더욱 풍부하게 해 준다. 그렇다. 같은 여자가 봐도 정말 사랑에 빠질 것 같다.
그러니 어린이들의 눈에 준원이 엄마는 여신 그 자체일 것이다. 어린이들이 원래 외모에 더 약한 편이니까.
사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는 아마 대부분의 애엄마들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어휴, 애 엄마가 왜 저러고 다녀?"
고백하자면 나도 그랬다. 저 엄마 옆에 있으면 안 되겠다. 위험하다.
하지만 준원이는 우리 둘째 아이와 '과'가 비슷해서 짐승소리를 내며 뛰어다니기를 좋아하는데, 그러니 놀이터에서 동선이 자꾸만 겹치고 만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열심히 살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는 나를 깨닫게 되었다. 성격도 호탕해서 자신의 모습을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고 아이의 문제점이나 고민거리들을 주저 없이 이야기하며 상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젊은 엄마들의 모습답지 않게 오히려 당당해 보였다. 준원이에게 한글책을 자주 읽어주지 않아서 아이가 수업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는 고민을 이야기할 때, 담임선생님에게 상담권유를 받고 아이를 위클래스에 보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교사의 입장이 되어서 아이가 많이 안쓰러웠고, 쉽게 하기 어려운 선택을 한 그녀에게 감탄하고 말았다.
만일 학교에서 그녀를 만났다면, 나는 아마 "에구, 엄마가 저러고 다니면 애한테 신경이나 쓸까."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지난 시절동안 학교에서 문제행동을 하는 어린이들의 엄마를 만났을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어머니 상과 조금이라도 다른 부분이 있다면 "저래서 애가 저런가 보다."라고 쉽게 판단해 버리곤 했다.
하지만 엄마가 풀메이크업을 한다고 아이가 잘못되나? 엄마가 네일아트를 한다고 아이가 이상한가?
조금만 생각해 봐도 나의 논리는 논리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마가 화장도 안 하고 눈곱 낀 눈으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면 그 아이는 인성이 바른 아이가 되나?
이것도 아니지 않나. 엄마의 화장과 아이의 인성과는 전혀 별개인데 나는 그동안 왜 그걸 상관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았을까.
지난 여름, 아이가 또 생일파티에 초대되었다. 그날 10명이 넘는 엄마와 아이들이 왔지만 생일을 맞은 아이의 엄마는 배달오기로 한 음식의 예약이 잘못된 걸 뒤늦게 알고 동분서주 정신없이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음식을 배달시키고 있었다. 테이블에서 수다를 떨고 있던 우리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하하 호호 웃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케이터링을 시켰는데 취소된 걸 알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배달된 음식들을 옆 테이블에 세팅하는 걸 보고 나는 슬쩍 일어나 같이 음식을 나르고 있었는데, 준원이 엄마도 뒤이어 와서 같이 음식들을 여기저기 담고 어디선가 비닐장갑을 공수해 와서 개별 접시에 차곡차곡 음식들을 배분했다. 어린 엄마가, 저렇게 풀메이크업을 하고 긴 생머리를 휘날리는데 일을 어쩜 저렇게 잘하나, 싶었다.
나는 그 순간 꼰대가 되어 준원이 엄마가 참 괜찮은 사람이네, 젊은이가 너무 일도 잘하네, 센스 있네, 속으로 별의별 판단과 칭찬을 다하고 있었다.
사실 준원이 엄마는 아마 유명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연예인처럼 하고 매일 학교 앞에 서있는데, 안 유명할 수가 있을까. 누구의 눈도 의식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데로 당당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 아마 티 없이 잘 크지 않을까, 남의 아이를 판단하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그런 생각이 스쳤다.
아이가 위클래스에서 상담을 받고 담임선생님과도 여러 차례 통화를 하면서 준원이 엄마는 아이에게 한글책을 읽어주느라 목이 아파서 약을 먹는다고 했다.
돌이 지나기 전부터 잠자리 독서를 하느라고 나 또한 아이에게 무수히 많은 책을 읽어줬지만, 사실 지금 우리 아이와 준원이의 수준은 비슷하다. 짐승소리를 내면서 뛰어다니는 모습뿐만 아니라, 단원평가는 오히려 우리 아이가 더 엉망이다.
그래도 나는 내 아이의 단원평가 점수에 연연하지 않는다. 문제를 이해 못 해서 수학 시험을 못 봤다고 하지만 이렇게 책을 많이 읽어줬으니 아마 내년쯤에는 잘하지 않겠는가 하는 믿음이 있기도 하고 말이다.
내가 휴직동안 느낀 여러 감정들이 있지만, 준원이 엄마를 통해 누군가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겠다는 진부한 사실을 또 하나 느꼈다. 자기 관리를 잘하는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마스카라 칠하느라 아이를 방치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복직을 하는 일은 신나지만, 한편으로는 다시 학부모들의 판단과 욕받이가 돼야 하는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해서 속이 조금 답답하다.
그래도 나는 학부모인 교사맘이니까 그네들을 조금은 더 이해하고 아이들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해서 병아리 눈물만큼은 나은 교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