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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 Nov 02. 2023

결혼 10년 만에 "미안하다"

주말부부인 우리는 주로 저녁쯤 남편이 전화를 건다.

나는 남편에게 웬만해서는 전화를 먼저 하지 않는다. 내가 전화를 잘 안 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사실 저녁 시간은 아이들을 챙기기에 바쁜 시간이라 짬이 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남편에게 전화를 걸 때는 주로 돈이 필요하다거나, 애들 때문에 화가 났을 때 화풀이를 하기 위해서인데, 남편은 그럴 때마다 나의 말을 잘 들어주는 참, 과묵한 남자다.


그날도 아이들을 재우고 거실에 너저분한 물건들을 대충 발로 쓱쓱 밀고 있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었다.

"여보세요?"

"부인 안 잤어?"

"안 잤지. 술 마셨구먼."

"마셨지. 00이 알지? 전에 있던 현장에서 나랑 동갑이던 애. 13살 어린 여자랑 결혼했잖아."

"아, 이름은 들어본 기억이 나는데 누군지는 잘 모르겠어. 내가 만난 적이 있던가?"

"결혼식에 갔었어. 애들이랑."

"아. 기억난다. 건설사 남자랑 결혼하는 어린 신부를 보고 내가 안타까웠던 기억이 떠오르네."

"맞아 맞아. 그 녀석 하고 오랜만에 술 한잔 했는데, 이혼한대."

"아이쿠야. 요즘 이혼 참 많이 하더라. 흠도 아니고."

"근데 내 친구 **이도 그렇고, 참 이 자식들 하는 얘기 들어보면 한심해."

"왜?"

"부인들이 뭐뭐 안 하고 잔소리한다고 싸우고, 이런 점이 마음에 안 든다. 저런 점이 마음에 안 든다. 불만이 많더라고."

"그렇겠지. 요즘 사람들, 손해 보는 거 싫어하잖아."

"그리고 부인들도 남편들이 육아 참여 안 한다고 엄청 싸우나 봐. 집안일도 뭐뭐 하라고 하는데, 우리가 시간이 없잖아. 야근도 많고, 새벽에 출근하는데 할 수가 없잖아. 그런데 그런 거 안 한다고 엄청 뭐라고 한다더라고."

"할만하지! 그러니까 내가 건설사 다니는 남자랑은 결혼하면 안 된다고 하는 거야."

"근데 들어보면 다들 나보다 더 많이 하는 거 같던데, 부인들이 다들 불만이 많더라고."

"허허"

"그래서 내가 깨달았지. 참, 나는 편하게 사는구나."

"어이쿠야. 남들 이혼하는데 내적 깨달음을 얻었구나."

"얻었지. 부인한테 미안하더라고."

"야야 닭살 돋게 무슨 소리야. 깨달았으니 다행이고! 발 닦고 자!"

"부인 미안해. 고마워."

오랜만의 닭살멘트로 보송송해진 통화를 끝마치고 나니 수액을 한통 맞은 것처럼 기운이 났다. 역시 사람은 누군가의 인정에 힘이 나나보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겠지만, 이 남자는 나 아니면 벌써 이혼당했다, 는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 나니까 안 싸우고 이렇게 사는 거라고. 심지어 이제 남편도 그걸 인정해 주니, 어깨가 좀 펴지면서 생활비를 더 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의 통장에도 잔고가 부족해서 이번달 생활비를 통으로 못 받은 건 그냥 넘어가야겠다.

생활비를 안 줘도 별말 안 하고 넘어가는 부인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라고 말하고 싶지만 말하면 입만 아파서 나 또한 별 말 하지 않는다.

비록 술을 마시고 고백을 했지만, 취중진담이라고, 그는 나에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하고 있다.

그동안은 사실 조금 뻔뻔스러웠는데, 주변에서 결혼한 지 몇 년 지난 친구들의 이혼소식과 불화 소식을 접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 자기도 곧 이혼당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혼하는 사람들이 다들 참지 못하고 이기적이라서는 아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의 이혼이 달가울리도 없고 말이다. 그래도 내 남편이 깨달은 바가 있다니, 싫지는 않았다.


과묵한 우리 부부는 서로를 향한 잔소리조차도 과묵하다.

대화가 부족한 건 그 나름대로 큰 문제가 될 수 있기에, 사실 나도 대답없는 그가 답답하고 짜증날 때가 많다. 하지만 나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주는 순간에도 "어쩌라고!"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한데, "힘들겠네."라는 말로 응수하는 그에게 나는 언제 고맙다는 말을 해본 적이 있었나, 반성하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그에게 그다지 미안한 건 없지만, 어찌 되었든 혼자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현재는 고마운 게 사실이니까 고마워하고 안쓰러워 하며 살 수 밖에 도리가 없지 않나.


늙으면 서로를 짠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거라는 선배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남편도 이제는 늙은 내가 많이 짠한가 보다.

술이 깨고 그는 더 이상 아무 이야기가 없다. 나 또한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는다. 결혼 10년 만에 남편의 깨달음과 미안하고 고맙다는 한마디가 그저 버티게 해주는 이유가 되었으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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