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폭을 맞춰 걷는다.

by 새벽책장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팡이를 왼손에 짚은 할머니와 할머니의 오른손을 깍지 껴서 잡은 중년의 여성이 걸어온다.

할머니는 학교에서 실내화로 신는 재질의 하얀색 신발을 신으셨다. 옛날 고무신 같은 느낌일까. 그래도 발이 시리지는 않게 털로 덮여있는 겨울실내화였다. 지팡이를 짚긴 하셨지만 걸음걸이가 매우 꼿꼿했다.

옆에 딸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은 빨간색 털슬리퍼를 신었다. 요즘 저렇게 뒤꿈치가 없는 털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유행인가 보다. 베이지색은 많이 봤는데 빨간색은 처음 본다. 그녀는 유니크한 유행을 따르는 취향인가 보다. 유행을 따른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거다. 타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이 좋아 보일 리가 없다.

그래서 나는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비슷한 후리스 점퍼를 입은 두 모녀의 모습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발걸음이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보폭이 일정하게 딱딱 맞았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내 옆쪽으로 1미터 정도 떨어져 섰다.


"그래가. 지영이 가는 괜찮더나?"

"겉으로는 그래 보이지 뭐. 울지도 않고 밥도 잘 먹어."

"그래도 속이 속이 아닐 건데."

"아마. 내가 하루종일 같이 있는 건 아니니까. 밤에 우는지 어쩐지. 푸석푸석하긴 하더라고."

"집에 가서 죽 좀 쒀야겠다. 이따가 지영이 가게에 가져다줘라."

"엄마도 뭘 죽까지 쒀. 밥 잘 먹는다니까."

"저녁에는 안 먹을 거 아이가. 내가 해 줄 게 그것밖에 없어 그러지."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고, 두 모녀는 나와는 반대편으로 멀어져 갔다. 걸어가는 등을 괜히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도 자연스레 보폭을 맞춰 걷는 두 여인의 모습이 왠지 따뜻했다.


지영 씨는 어떤 사연을 가졌길래 두 모녀의 근심 속 대화 주제에 떠올랐을까. 편안한 대화 속의 주인공 치고는 슬픈 사연을 가진 것 같아, 누군지도 모르는 지영 씨가 궁금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내가 지영 씨를 궁금해하는 것은 그냥 가십거리겠지만 두 여인의 지영 씨에 대한 마음은 따뜻함일 거다.

나도 누군가의 안주거리였던 적이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의 진심 어린 걱정의 대상인 적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누구에게 따뜻한 적이 있었나.


낮에는 괜찮은 척 밥을 잘 먹고 울지도 않는 그녀는 푸석푸석한 아침을 맞이한다. 밤에 울지는 않더라도 밤잠을 설치며 지내고 있으리라. 속이 속이 아닐 거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를 살아내는 그녀의 마음이 어쩌면 남들에게 괜찮아 보이고 싶은 심리였지 않을까.

괜찮아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는 모른척해주는 것도 좋은데 말이다.


그래도 발걸음이 잘 맞는 두 모녀의 모습을 보면 살아온 세월 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무관심하지 않은 마음씀이 배어있는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호의는 어디까지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할머니가 끓인 죽은 어떤 죽일까, 지영 씨의 입맛에 맞겠지.


나도 한때는 낮에 괜찮은 척 웃고 지내지만 밤에는 꼭 눈물을 흘려야지만 잠이 들던 때가 있었다. 나의 슬픔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만 내 앞에서 내색하지 않으려는 그들을 나조차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던 날들이 있었다. 그냥 내버려 뒀으면 좋겠는 마음과 누군가와 울면서 속에 있는 말들을 쏟아내고 싶다는 마음이 공존하던 날들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나에게 위로의 마음을 건네줬던 이들이 더욱 크게 생각되는 날이 온다.

그래서 인간 사이의 적절한 거리가 그렇게 어렵다는 걸 또 느낀다. 적절한 위로란 어디까지일까.


결국 사람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보폭을 맞추며 슬픔 속에서도 서로에게 기대어 극복해 나가는 인생을 살아내고 있다. 나도 누군가의 슬픔에 죽을 끓여 줄 수 있는 배려심을 가진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결국 나만 슬픈 건 아니라고, 가게에서 하루종일 씩씩하게 일하고 웃고 있는 지영 씨도 밤에는 눈물짓고 있으니, 지금 웃고 있는 나의 옆 사람이 마음까지 늘 행복한 건 아닐 수도 있음을, 기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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