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큰 이모는 정말 미인이시다.
어릴 때 엄마의 앨범을 보다가 미스코리아 같이 생긴 여성의 증명사진을 보고 이게 누군지 물어봤다. 우리 가족 중의 한 명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큰 이모였다.
하지만 당시 현실의 큰 이모는 생활에 찌들어 항상 화를 내고 인상을 찌푸리는 목소리가 큰 무서운 이모였다. 사진 속 이모와 현실의 이모는 다른 사람 같았다.
이모는 서른네 살에 사별을 하셨다.
이모부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셨다고 한다.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하셨다는 것을 들었는데 직책이나 하시는 일이 뭔지는 잘 모른다. 시골에서 자랐던 예쁜 처녀는 드라마처럼 늘 그렇듯, 능력 많은 남자를 만나 상경했다.
행복은 항상 갑자기 다가와 뒤통수를 치기 마련인가. 이모부께서 일하다가 쓰러지셨다.
젊은 여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가정주부였던 우리 엄마가 항상 큰 이모네 아들 딸을 챙겼다.
이모네 식구들이 내려온 이후로 나는 사촌 언니와 항상 붙어 다니는 사이가 되었다.
언니는 키가 작았고, 까무잡잡했지만 공부를 잘했고 무척 야무졌다. 언니옷은 내가 항상 물려 입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언니의 모든 것을 따라 하고 싶었다.
언니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바쁜 이모를 대신해 엄마와 내가 언니의 졸업식에 갔다. 엄마는 그날 사탕꽃다발을 준비했다.
처음 봤다. 사탕꽃다발.
나는 그게 너무 가지고 싶었다.
"엄마 나도 사탕꽃다발 갖고 싶어."
"안돼."
"왜?"
"넌 졸업 안 하잖아."
"그럼 졸업할 때 사줘."
"알았어."
그러나 나는 그 이후로 사탕꽃다발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은 내가 갖고 싶어 하던 바비 인형이 우리 집 부엌 옆 창고 제일 높은 칸에 있는 걸 봤다. 내 생일도 아니고 어린이날도 아닌데 내 선물이 왜 저기 있지?라고 생각했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일주일 뒤 언니의 생일이었고, 그 인형은 언니 거였다.
엄마는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을 언니에게 사주었다. 나는 점점 언니도 밉고 엄마도 미워졌다.
커갈수록 언니 옷을 물려 입는 게 싫었다. 소매가 해지고 내 몸에는 큰 코트를 3년을 입을 때도 억울했다.
몇 년 후 우리 가족은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고향에 남은 사촌 언니와 오빠는 더 이상 우리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은 청소년이 되었다.
어린 나는 사탕꽃다발이 갖고 싶어서 초등학교 졸업식에 사탕꽃다발을 사달라고 말했다가 엄마에게 혼이 났다. 물론 그냥 꽃다발을 주시긴 했다. 졸업식 당일 교문 앞에서 파는 몇천 원짜리 꽃다발이었다.
내가 스무 살이 되던 그 해, 대학생이었던 언니는 나를 데리고 대학로 공연을 보여주었다. "지하철 1호선"이라는 뮤지컬이었는데, 음악소리 때문에 심장까지 쿵쿵 거리는 공연을 난생 처음 보고 황홀경에 빠졌다. 대학생이 된다는 건 이런 거구나, 라고 느꼈다.
그날 언니의 자취방에서 같이 잠이 들며 언니가 말했다.
"어렸을 때, 너희 엄마, 그러니까 이모 덕분에 내가 참 안정되게 살았던 것 같아."
졸음이 쏟아지는 나른한 기분 속에, 엄마와 언니에게 서운해서 못되게 굴었던 유치한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언니는 한 번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는 것도.
아빠가 없는 조카들에게 뭐든지 다 해주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았던 밤이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그날 밤 이제 더 이상 사탕꽃다발은 필요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