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기획전시 전시평
"조경은 땅에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듯, 우리가 섬세히 손질하고 쓰다듬고 가꾸는 정원들이 모든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치유와 회복의 순간이 되길 바랍니다." - 정연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024년 4월 5일부터 9월 22일까지 진행되는 정연선 조경가의 개인전은 제7 전시실과 전시마당 그리고 종친부 마당에서 펼쳐진다. 1941년대 생 정영선은 한국의 1세대 조경가이자 여성 1호 국토개발기술가로 대한민국 조경계의 pioneer이다. 지금도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정영선의 지난 50년간 작업을 돌아보는 전시가 바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이다. 자연과 건축물과 이를 에워싸는 주변 환경의 조화를 꾀하며 가장 자연스러운 미를 식물을 활용해 형성하는 정영선은 계획 하에 심어둔 수종의 미래 청사진을 상상하며 조경 작업을 진행해 왔다. 정연선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선유도 공원> 사업은 기존 선유도 정수장에서 사용되었던 철근 콘크리트가 세월과 바람에 의해 자연스럽게 풍화되면서 그 위로 자라날 식물의 형상을 머릿속에 그리며 조경계획을 짜는 작업으로 초록의 눈으로 상상한 새로운 지형을 그리는 과정이었다.
본 전시에서는 '건축 환경의 회복 탄력성'과 '지속가능성'을 주창한 정영선 작업 과정을 도면, 드로잉, 사진, 모형, 영상 등의 아카이브 자료로 만나볼 수 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각기 다른 초록 빛깔 식물의 이미지는 화이트 큐브의 공간에 청량함을 유입하며 본래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피톤치드의 향기를 연상하게 했다. 정영선에게 조경은 미생물부터 우주까지 생동하는 모든 것을 재료로 삼는 종합과학예술이었다. 전시장의 쇼케이스에서 보이는 각종 도면과 드로잉 그리고 식물에 대한 연구는 과학과 예술이 만나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종합 공간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드로잉이 인상 깊었는데, 단순한 아이디어 스케치를 넘어서 다채로운 색상으로 채색까지 꼼꼼하게 완성된 드로잉은 계획안이 아닌 회화 작업처럼 느껴졌다.
정연선의 전시는 '패러다임의 전환, 지속 가능한 역사 쓰기', '세계화 시대, 한국의 도시 경관', '자연과 예술, 그리고 여가생활', '정원의 재발견', '조경과 건축의 대화', '하천 풍경과 생태의 회복', '식물, 삶의 토양 아래'로 총 7개의 테마로 구성되었다. 7개의 테마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예시 사례들을 제시하며 정연선의 작품 활동의 세계관을 시각화한다. 이 모든 테마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줄기가 있다면 그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 건축과 공생하며 미래를 그리는 살아있는 자연환경의 조화이다. 초록 빛깔의 식물 형상과 시간의 흐름이 합쳐진 전시장 내의 아카이브 자료들은 자연스럽게 프랑스 관념론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지속(duration)'을 떠올리게 했다. 흙에 뿌리를 내린 수목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성장하기에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모습은 지속적으로 달라진다. 우리는 미래의 모습을 현시점에서 예측을 할 수 있을 뿐, 실제로 펼쳐지는 미래의 모습은 우리가 꿈꾸는 모습과 같지 않다. 베르그송은 생명이 가지고 있는 시간은 '순수 지속'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지속은 직관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진정한 시간은 살아 움직여 내적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창조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초록 빛깔의 생명체들은 사계절의 기후변화를 거치며 개별적인 변화의 시간을 가지며 때로는 웅장한 혹은 비움의 모습을 보여주며 성장해 나간다. 이 성장의 시간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경치를 창조해 낸다. 응집된 시간과 조경작업을 통해 뿌리내린 생명이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성장해갈 때 인간이 생활하는 공간은 조금씩 그리고 지속적으로 변화해 간다. 조경가인 정연선은 아마도 이러한 변화의 모습을 생물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직관적으로 바라보며 조경을 설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정연선의 <경춘선 숲길>은 지속가능성을 보여준 작업으로 노선이 바뀌면서 운행을 멈춘 경춘선 구간을 공원화시키는 프로젝트였다. 경춘선은 일제 강점기 춘천지역의 상인들이 자본을 보아 독립적으로 건설한 중요한 근대문화유산이다. 이 프로젝트를 맡은 정연선이 설립한 조경설계회사 서안은 '철길을 대하는 태도'에 초점을 맞추어 작업했다. 운영을 멈춘 철길을 훼손하지 않고 최대한 원형을 살리면서 기존의 녹지를 유지함과 동시에 주변 주거환경과 한데 어우러지는 공원으로 경춘선 철길을 숲길로 탈바꿈시켰다. 이 프로젝트는 조경설계와 도시개발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지역 활성화를 이룬 좋은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1993년 전 국민의 이목을 대전으로 집중시킨 <대전 엑스포>는 세계화 시대를 맞이한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시경관을 보여준 프로젝트였다. 1990년대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선진국의 대열로 진입하기 위한 발판을 다지고자 '새로운 도약의 길'이라는 주제로 과학도시인 대전에서 엑스포를 개최하였다. 세계인의 축제인 엑스포의 활기찬 분위기를 형성하면서 한국을 알리기 위한 전통적인 모티브와 과학 박람회라는 특성을 살리기 위해 서안은 첨단 시설과 인공물 위주의 엑스포장에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숲과 꽃을 조성하여 휴게공간을 디자인했고 대한민국 고유의 안압지 형태의 수공원과 무궁화동산을 마련하였다.
1997년 한불수교 100주년을 기념하게 설계된 <파리공원>은 당시 서울 서남권을 대표하는 공원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한불 수교 100주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프랑스 파리의 14구에는 서울광장이 조성되었고 서울 양천구에는 파리공원이 설계되었다. 파리 공원은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에 위치한 공원으로 시민들이 사계절 수종의 변화를 경험하며 느긋하게 쉼을 즐기는 유희적인 공간이다. 서안은 태극 패턴을 공원 설계에 도입하여 땅의 태극과 물의 태극이 어울리도록 공원을 구성했다. 탁 트인 광장 형태의 파리공원에서 시민들은 자전거, 인라인, 농구 등 스포츠를 즐길 수 있으며 파리 공원의 내외부를 관통하는 울창한 수목은 도시 한가운데서 자연을 만끽하게 하며 철마다 피고 지는 꽃과 곤충들의 변화를 통해 생태계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제주 오설록>은 제주도 중산간에 위치한 곳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차 생산지인 서광다원과 함께 다도 문화를 널리 전파하는 티뮤지엄, 티스톤, 티테라스가 있는 종합문화공간이다. <제주 오설록>을 운영하는 오설록은 2001년 티뮤지엄을 건립한 이후 단계적인 확장을 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11년 서안은 오설록과 긴밀한 논의 끝에 확장 과정의 마스터플랜을 세웠으며 곶자왈 숲을 품고 있는 제주 중산간의 지정학적인 특성을 살려 건축물과 제주의 풍광이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을 설계했다. 정원에는 원래 식생에 가까운 상록 활엽수를 배치하고 단차를 둔 도보길을 구성하여 리듬감 있게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산책로를 디자인했다. 곶자왈과 정원이 만나는 곳에는 습지를 조성하여 수생식물을 심어 땅과 물이 연결된 공간의 자연변화를 느끼게 하였다.
한국화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장면을 연상시키게 하는 <희원>은 밝은 동산이라는 뜻으로 호암미술관 개관 15주년을 기념하여 1997년 완공되었다. 희원은 직선으로 이어서 한눈에 그 형태를 조망할 수 있는 서양식 정원이 아닌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수록 변화되는 경관을 만끽할 수 있는 한국식 정원으로 설계되었다. 전시장에 진열된 희원의 사진 자료들은 한지에 곱게 채색된 한국화가 총천연색으로 복원된 듯한 느낌을 준다. 정연선은 희원에 조선시대의 문인들이 사랑했던 매, 난, 국, 죽을 심어 전통적인 미가 공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게 설계했으며 외부를 바라보는 창이 아닌 풍경을 담는 액자 역할을 했던 한옥의 창 개념(차경)을 도입하여 전통 정원의 조형미를 살렸다. 정자, 담장, 석탑 등 건축적인 요소들은 자연적인 요소와 절묘하게 결합되어 희원만이 가진 고요하면서 목가적인 풍경을 빚어냈다.
정연선의 전시는 인간이 생존하는 공간이 최대한 자연과 가까워질 때 가장 자연스러운 서정적인 상태라는 것을 보여준다. 정연선이 그동안 진행해 온 작업들은 국내 최고의 조경 전문가가 설계한 공간이지만 마치 태초의 자연 그 모습 그대로 복원시켜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연출은 인간과 동식물이 함께 공유하는 자연이라는 선물을 최대한 배려한 결과이기도 하다. 전시를 관람하는 내내 이유 없이 마음이 편안하고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서 느긋하게 아카이브 자료들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살아 숨 쉬는 초록 빛깔 식물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평소에 초록색은 자연에서 가장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색이라고 생각해 왔다. 명도가 높은 밝은 노란색을 머금은 연두색에서 시간이 지나면 탐스러운 빛을 뿜어내는 짙은 초록색으로 변화했다가 자연스럽게 다시 한번 시간이 흐르면 주황빛을 거쳐 갈색이 되고, 마지막에는 잎이 떨어서 비움을 완성하는 초록색은 자연이 인간에게 선물한 안식에 가장 가까운 색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안식의 초록색이 국립현대미술관 제7전시장을 가득 메운 본 전시는 필연적으로 관람객에게 시각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편안한 쉼을 제공한다. 식물에 관심이 있는 식집사님들과 마음의 쉼을 느끼고 싶은 삶이 분주한 현대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전시 관람을 권하고 싶다. 일차적으로 눈이 쉼을 얻고 이차적으로 마음이 정화되고 삼차적으로 전시장 내부에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비가 온 다음날 느낄 수 있는 초목의 향내를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되는 '공감각적인 휴식의 흐름'을 선사하는 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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