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솔올미술관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전시리뷰
강릉 솔올미술관에서 2024년 5월 4일부터 8월 25일까지 열리는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은 아그네스 마틴의 주요작 25점을 선별하여 전시한 국내 최초의 미술관 전시이다. 캐나다 출신의 아그네스 마틴은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며 작품 세계를 펼쳤다. 캐나다 교외지방에서 성장하고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과 뉴멕시코 황량한 사막에서 작품을 창조해 낸 아그네스 마틴은 조현병으로 고통받으면서 이를 예술로 승화해 냈다. 평생 정체성 갈등과 정신질환 속에서도 아그네스 마틴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자신만의 독보적인 조형적 언어를 창조해 냈다. 대형 캔버스 위에 펼쳐진 아그네스 마틴의 예술세계는 비움과 또 그 비움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채움으로 명도가 높은 아련한 파스텔 색상으로 표현되었다. 대학시절 접한 선불교와 도교사상은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강원도 여행을 떠나면서 꼭 방문하고 싶었던 강릉 솔올미술관은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한 곳으로 자연광과 흰색의 건물이 만나 미니멀리즘적이면서 햇살이 공간을 가득 메우는 공간이었다. 리처드 마이어의 공간적인 미니멀리즘과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적인 미니멀리즘이 만나는 이 장소에서 방문객들은 여유롭게 숨을 들이키는 느긋한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얻게 된다. 군더더기 없는 공간이 선물하는 자연스러운 비움의 과정이다. 전시장에서 작품의 촬영이 금지되었기에 이번 글에서는 구글에서 다운로드한 이미지로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전시는 1955년 아그네스 마틴이 구상회화를 벗어나 추상회화로 이동하는 시기에서 출발하면서 그녀의 작품 세계가 어떤 식으로 변화되었는지 보여준다. 아그네스 마틴은 미니멀리즘 미학의 극치로 자주 설명되곤 하지만 실제로 작가는 자신이 미니멀리즘으로 해석되기보다는 추상표현주의로 분류되기를 선호했다고 한다. 총 25점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 싶었던 것은 아그네스 마틴의 <순수한 사랑> 시리즈였다. 1999년에 제작된 <순수한 사랑> 시리즈는 미국에 위치한 디아 파운데이션의 소장품으로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과 연필을 활용해 100호 정도 크기의 캔버스에 제작한 작품이다. 순백의 캔버스에 가까운 듯한 명도 높은 밝은 파스텔톤으로 채색된 작품들은 맑고 흐린 듯한 컬러 속에서 작가의 감정을 그림 속에 고스란히 담아 전달하고 있었다.
아그네스 마틴의 <사랑>은 흐드러진 듯한 파스텔 블루와 흰색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파스텔 블루와 화이트는 캔버스에 블록으로 나뉘어 채색되었는데, 아련하게 채색된 색상은 시각적으로 경계가 분명한 솔리드 컬러라기보다는 파스텔 블루와 화이트가 각자의 공간 안에서 끊임없지 소통을 시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파스텔 블루 영역에서 발견되는 화이트는 차가운 느낌보다는 따뜻한 느낌의 미색으로 느껴지고 파스텔 블루의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화이트의 컬러 영역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아그네스 마틴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경계를 허물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또 하나의 세계였을 것 같다.
앞서 언급한 <사랑>과 비슷하면서 다른 작품인 <순수한 삶>은 물끄러미 시선이 머물게 되는 회화작업이었다. '순수함은 어떠한 컬러로 대변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품게 되는 작품이었고 상아빛을 띠는 옐로와 아주 흐린 파스텔 블루와 화이트가 조화롭게 각자의 채색면을 지키고 있었다. 솔올미술관이 위치한 강릉의 자연경관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기도 했다. 끝없이 펼쳐진 강원도의 산을 내리쬐는 강렬하면서 투명한 태양은 상아빛을 띠는 옐로와 잘 어울리고 동해안의 깊고 푸른 바다는 청량한 파스텔 블루를 떠올리게 하며 강원도의 맑은 공기는 화이트 컬러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서울의 유명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만났다면 아마도 다른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멀리 강원도까지 찾아와 만났기에 이 작품은 청량하게 느껴진 강원도의 자연환경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
순수한 어린아이들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하는 단어는 바로 노란 병아리이다. 아그네스 마틴의 <순수한 삶>에서도 노란 병아리를 연상시키는 옐로 컬러가 사용되었다. 순수함을 느끼고 표현하는 방식은 창작자 고유의 영역이지만 해당 작품에서 사용된 노란 병아리를 연상시키는 옐로 컬러는 색채에 대한 공통적인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옐로의 순수함에 맑은 기운을 가진 파스텔 블루와 화이트가 만나는 이 작품은 관람객에게 순수함에 대해 각자 품고 있는 유년 시절의 기억 떠올려보게 한다.
이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처음 든 생각은 '아그네스 마틴도 아기들이 가진 특유의 에너지를 정확히 알았군!'이었다. 작품 속의 색면의 경계가 다른 작품들보다 뚜렷하고 그로 인해 채색 대비가 강하게 느껴졌던 이 작품은 알록달록한 무지개를 연상시키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작품이었다. 색감의 경계와 핑크, 옐로, 파스텔 블루의 색상 차이는 에너지를 느끼게 했고 동시에 아이들의 순수함을 떠올리게 했다. 어린아이들이 까르르까르르 웃는 웃음소리와 끊임없이 꼬물꼬물 움직이는 에너지를 단순화시켜 색면 추상화로 완성한 아그네스 마틴은 어쩌면 이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 내내 행복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았다. 명도 높은 파스텔컬러로 흐릿한 듯 하지만 알록달록한 색채감이 주는 행복감은 솜사탕을 한입 베어 물었을 때 입안에서 퍼지는 달콤함을 연상시켰다. 이 작품을 함께 관람하고 있던 만 5세 딸아이는 "엄마 이 그림은 매우 잘 그린 것 같아."라며 본인이 작품을 보고 느낀 느낌 그대로의 원초적인 감상평을 남겼고 이 짧은 한 줄의 평을 들으며 아그네스 마틴은 세월을 초월해 2018년 생에게 행복감과 미소를 선물해 주었다는 생각을 했다. 생글생글 웃는 어린이의 모습과 <아기들이 오는 곳>은 그 모습이 닮아 있었다. 아이들 이주는 행복감과 사랑스러운 에너지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는 거대한 평면에 구상의 형태가 아닌 추상의 색과 선으로 작가의 현존을 남긴 사조로 정의되곤 한다. 잭슨 폴록이 그 대표주자이며 미술에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들은 잭슨 폴록이 큰 스케일의 캔버스에 남긴 작가의 흔적을 보며 열광한다. 잭슨 폴록은 작업하는 당시 피웠던 담배꽁초와 신발 자국도 캔버스 위에 남겼으며 강렬하게 움직인 작가의 행위도 거칠고 두꺼운 물감의 표면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강렬한 에너지의 표현이자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 아티스트를 느낄 수 있는 초월적인 현존이기도 하다. 반면 아그네스 마틴은 작가의 현존을 강렬하게 느껴지는 물리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최대한 비우고 그리고 그 비움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투명하게 채색한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가의 현존을 느끼게 한다. 현대인이 일상에서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인 비움을 아티스트는 물감과 붓을 활용해 시각적으로 드러나게 했으며 이를 감상하는 동시대인들은 작품과 마주한 순간 눈과 마음의 유기적인 체험을 통해 비움을 깨닫는다. 아티스트에게 순백의 캔버스와 이질적이지 않는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은 채색과 지움과 그 위에 의미를 덧입히는 수련의 과정이었을 것 같다.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이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은 강렬한 현존이 아닌 비움의 현존을 통해 마음에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강릉까지 먼 길이었지만 '오기를 참 잘했다' 싶은 경험이었다. 미니멀리즘적인 미술관의 공간이 주는 비움과 강원도의 자연이 선사하는 청량함과 아그네스 마틴이 선물해 주는 조형적인 비움의 미는 서울을 떠난 여행자에게 자연과 예술이 의도치 않게 선물해주는 주는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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