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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직, 47세’ 수잔 보일이 세상으로 쏘아 올린 꿈

2009 영국 오디션 프로그램 브리튼스 갓 탤런트 우승자

2009년,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영국의 오디션 프로그램 브리튼스 갓 탤런트 (Britain's Got Talent)에 수잔 보일이라는 47세의 무직 여성이 무대에 올랐다. 그레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법한 외모에 자신을 전혀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난 그녀에게 심시위원들과 방청객들은 조소를 금치 못했다.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에게 신랄한 악평을 쏟아붓기로 유명한 사이먼 코웰 심사위원은 공연 초반부터 나이를 묻는다.

"How old are you, Susan?"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그리고 수잔은 대답한다.

"I am 47."

“전 47세입니다.”


그러자 심사위원인 사이먼 코웰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방청객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나이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서양 사람에게도 47세는 많은 나이인가 보다. 그러나 수잔은 전혀 개의치 않고 허리 돌리기 춤을 추며 나이는 자신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말한다. 허리 돌리기는 사실 퍼포먼스에 가까운 응대였는데 여기서 방청객들은 인상을 더 찡그리고 다른 심사위원인 대중문화평론가 피어스 모건은 눈살을 찌푸린다. 그나마 수잔에게 중립적인 반응을 보인 나머지 한 명의 심사위원은 영국의 배우 아만다 호웰이었다.


수잔 보일, 무직, 47세

47세, 한국 사람들이 잘 사용하는 수식어, ‘거의 반 백‘의 나이 앞에 사이먼이 질문을 한다.


"What's the dream?"

"꿈이 무엇인가요?"


그러자 수잔은 이 오디션 프로그램 에피소드 중 가장 흥미롭고 역사적이면서 동시에 중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도전을 앞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말을 한다.


자신의 가장 진심이 담긴 그러나 전혀 꾸미지 않은 말.


"I am trying to be a professional singer."

"저는 프로페셔널 가수가 되기 위해 시도 중입니다." (그대로 직역하면)


그러자 사이먼이 이에 응수하면서 정곡을 찌르며 묻는다. 어떻게 보면 사실을 확인하는 말이기도 하다.

"Why it hasn't worked out so far?"

"왜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거죠?"


우리 식으로, 그러니까 K-pop culture대로 생각해 보면 47세는 이미 은퇴해서 작곡가, 작사가로 역할을 하다가 슬슬 물러나서 기획사의 임원자리를 해야 할 나이인데, 수잔은 이 나이에 현재진행형의 도전을 하고 있었다.


이 질문에 대해 수잔은 이렇게 대답한다.

"I haven't had a chance before. This whole figure would change it"

"그동안 기회가 없었어요. 이번 기회가 상황을 바꿀 거예요"


영국 스코틀랜드의 한 시골마을 출신인 수잔 보일은 12세부터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주로 마을 광장, 교회, 가라오케 등에서 불렀다고 한다. 그녀에게 수많은 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는 이번 오디션이 처음인 것이다.


심사위원들과의 짧은 사전 인터뷰가 끝나고 수잔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래의 동영상 링크 클릭)


https://www.youtube.com/watch?v=mS5Om47vsaA&list=RDmS5Om47vsaA&index=2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하는 중년이라면 동영상의 처음부터 시청하시기를 권한다. 왜냐하면 동영상 초반의 수잔 보일은 약간은 초조한 상태로 새로움에 도전하는 중년의 초상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약간은 들떴지만 설레이는 그렇지만 초조함이 더 큰 상태 말이다.


심사위원과 방청객의 일관된 조롱을 받던 수잔이 레미제라블에서 앤 해서웨이가 불렀던 I Dreamed a Dream을 한 소설, 정말 말 그대로 한 문장을 부른 순간 세 명의 심사위원들과 관중들의 반응은 급변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가수가 되고자 한 사람의 진정성 있는 음성을 모두 다 같이 온몸으로 느낀 것이다.


한 다섯 소절 불렀을까, 악평으로 유명한 사이먼은 사랑에 빠진 듯한 표정을 하며 수잔의 공연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공연을 즐기면서 직관한다. 그는 표정으로 ‘세상에 이런 목소리가 있을까?’라고 말한다. 실제로 현재 음반 사업가로 성공한 사이먼의 신랄한 악평은 현재의 사이먼을 만든 가장 큰 무대적인 장치이다. 아메리칸 아이돌, 브리튼스 갓 탤런트 등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사이먼은 정곡을 찌르는 악평을 하며 참가자에게 일침을 놓아 참가자를 울게도 만들고 극의 긴장감을 높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이먼의 이러한 악평이 없었으면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인 아메리칸 아이돌과 브리튼스 갓 탤런트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해주어야 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을 작정한 듯이 털어내는 사이먼의 워딩은 자극적이지만 어느 정도는 상당히 사실적인 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평가를 들으며 방청객 및 시청자들은 내심 속으로 '좀 심하지만 맞아'라며 동의를 해왔다.


억지로 꾸민 과장적인 화려함은 없는 그러나 진심이 담긴 수잔의 무대가 끝나자 그녀는 바로 무대에서 퇴장하려고 한다. 자신의 목표인 많은 관중 앞에서 노래를 불렀기에 그녀의 목표는 여기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나보다. 아마도 긴장을 많이 한 탓도 있었을 듯하다.


퇴장하려는 그녀를 붙든 세 명의 심사워원은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며 수잔에게 감동이 가득 담긴 찬사를 하기 시작한다.


영국의 대중문화 평론가인 피어스 모건은 "지금까지 3년 동안 이 오디션을 진행하면서 느낀 가장 놀라운 감동"이라고 말하고 연이어 "이제는 아무도 당신을 향해 웃지 않아요!"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평가한 참가자 중에서 ‘가장 우수한 호평(the biggest yes)’준다고 말했다. 세 명의 심사위원 중 가장 중립적이었던 배우 아만다 호웰은 "처음에 우리 모두가 당신을 향해 매우 시니컬했죠. 그렇지만 당신의 공연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렸고 이 공연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을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해요."라고 찬사를 보낸다. 악랄한 심사위원인 사이먼은 수잔에게 "3개의 Yes를 가지고 당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네요"라고 그녀의 공연에 대해 평가했다. 기존의 악랄한 평은 없고 간단명쾌한 승낙만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시즌 중간에 수잔에게 최종 승자의 여부와 관계없이 음반을 내주기로 약속했고 수잔의 음반은 사이먼의 회사에서 릴리즈 되었다.


우연히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추천한 이 동영상을 15년 만에 다시 보았는데, 이전과 다른 큰 감동이 나에게 다가왔다. 아마도 내가 동영상 속의 수잔과 나이격차를 15년간 확 단축시킨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을 것 같다.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도전 중인 47세, 반 백의 나이에 여태껏 되지 않은 것을 계속 도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본인도 이미 포기했을 법하고 주변에서는 본인의 의지보다 더 강력하게 만류해 왔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수잔은 누구나 포기했을 법한 시점에 도전하여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그랬기에 이 오디션 동영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시청했고 지금도 찾아보는 오디션계의 레전드 동영상이 되었다.


40대 혹은 50대 초반의 무언가를 새로 준비하시는 분들이 이 동영상을 꼭 보시기를 바란다. 반백의 나이는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 날이 짧다’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사실 지금까지의 실패 경험과 도전의 사례를 통해 역으로 바라보면 그 누구보다 위기관리를 잘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껏 도전해도 잘 되지 않았던 것들(도박, 비트코인, 주식, 부동산 등 투기성 행위 빼고) 한 번만 더 도전했을 때 중년의 우리는 어쩌면 이번에는 정말로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이런 생각을 했다. '와, 내 나이가 이제 40 넘었고 애도 둘인데 내가 어떻게 큐레이터 일을 다시 시작하지? 누가 날 뽑아줄까? 일을 안 하고 애를 잘 키우는 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 아닌가?', '요즘 애들 심리적인 문제를 다룬 tv 프로그램도 많고 정신과에 가면 애들이 정말 많은데 내가 집에 붙어 있어서 애를 잘 키워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실질적인 고민 앞에 나는 별말 없이 현실을 잘 받아들이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둘째 아이를 어린이집으로 등원시키는 길에 우연히 양천문화재단 건물 앞에 붙은 "예사로움"공모전 포스터를 보게 되었고 이것이야 말로 내가 지금 당장 도전해봐야 하는 공모전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공모전에 도전해 본 적이 없다. 대학원을 다니며 박물관 인턴을 하고 대기업 공채가 되고 그리고 퇴사하고 전시기획사 큐레이터로 13년을 살면서 공모전이라는 벽은 나에게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근데 내가 공모전이 되겠어?'라는 생각이 늘 내 마음속 한편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상 "예사로움"공모전에 지원하려고 관련서류를 훑어보다 보니 국가에서 정한 청년의 나이는 서류심사 때 3점을 더 준다고 한다.


‘아뿔싸, 청년은 진작 지났는데 이게 되겠나.‘ 싶었지만 공모전을 도전하는데 시간은 들지만 돈을 들지 않는다는 중년 아줌마의 현실적인 계산을 하고 참가 신청 서류를 접수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정한 청년은 아니지만 중년의 나이로 서류와 인터뷰를 통과하고 이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한없이 부족한 나의 사례가 도전을 앞둔 중년의 많은 분들에게 격려가 되길 바란다. 비록 청년이 아니어도 우리는 어쩌면 이번에는 잘 할지도 모른다. 때때로 희망은 현실보다 강력하게 작용한다. 여러분 힘을 내세요. 우리가 아는 ‘힘을 내요 Mr.Kim’이라는 노래도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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