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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그는 누구인가?

한 개인으로 바라본 겸재 정선

'겸재 정선'이라고 하면 '인왕제색도'를 그린 조선시대의 화가라는 관용구적인 설명이 바로 떠오릅니다. 조선시대의 화가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도화서(화원)의 직업화가와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문인화가입니다. '화가'라는 수식어를 가진 겸재 정선은 어느 출신일까요? 인터넷을 찾아보면 겸재 정선이 마치 도화서에서 활동한 것처럼 설명한 포스팅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겸재 정선의 도화서 생활은 굉장히 짧기 때문에 그가 도화서 출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해당 내용은 겸재 정선의 회화를 연구하시는 한국 미술사 박사님께 질문해서 확인한 내용입니다. 저도 정선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전에는 인터넷에 나온 내용만을 보고 막연히 겸재 정선도 도화서에서 화원 혹은 스승으로 제자를 양성하며 활동했는지 알았습니다. 그토록 그림에 뛰어났던 겸재 정선이 도화서 소속으로 활동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가 양반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도화서 화원들은 중인 출신들이 하는 것이었기에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도화서 화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겸재 정선은 숙종 2년 1676년 인왕산 자락에서 몰락한 양반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안타깝게도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생활했다고 합니다. 당시 동네 이웃인 안동 김씨의 배려로 친구 이병연과 함께 김창흡 문하에서 공부하며 시서화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동 김씨의 도움으로 38세 '세자익위사' 벼슬을 얻습니다. '세자익위사'벼슬이란 왕세자가 외출 시 "세자님 납신다~길을 비켜라~"라고 외치는 역할을 하는 직업입니다. 당시 최하 말단의 벼슬이었다고 합니다. 


겸재 정선이 활동하던 당시 조선시대 양반사회에서는 선비들이 잡기에 빠지는 것을 금했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서화가 강희안은 "글씨와 그림은 천한 재주일 뿐 이것이 후대에 전해진다면 내 이름만 욕되게 한다"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말을 남긴 강희안은 과연 누구일까요? 


강희안, <고사관수도>, 23.4㎝×15.7㎝, 지본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상단의 <고사관수도>를 그린 화가가 바로 강희안입니다. 후대를 사는 우리에게 강희안이라는 이름은 <고사관수도>와 동일하게 다가옵니다. 바위에 턱을 기대고 수면을 바라보는 노인을 묘사한 <고사관수도>는 조선초기를 대표하는 산수화로 작품에서 인물의 비중이 커진 대표적인 예입니다. 조선 초기의 산수화에서는 인물이 정말 개미처럼 작게 그려지다가 중기로 넘어가면서 인물이 점점 커집니다. 산수화에 있어서 전면에 위치한 나무대신 인물의 크기를 키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강희안의 <고사산수도>입니다. 강희안 스스로 글씨와 그림으로 이름을 남기길 경계했지만 우리는 이제 그를 조선시대 서화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명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문인들은 취미로 서화를 즐겨 그렸습니다. 사군자는 취미로 그리되 너무 몰입해서 직업으로 하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그러나 겸재 정선은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나는 그림을 그리겠다."라고 천명했다고 합니다. 당시 그림을 천시하는 시선 때문에 겸재 정선은 상소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영조실록』 81권 영조 30년 1754년의 기록을 보면 "정선은 천한 기예로 이름을 얻고 잡직으로 벼슬을 했으니 파직하소서"라는 내용의 상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정선을 아꼈던 영조의 배려로 그는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정선의 친구인 관아재 조영석의 『관아재고』를 보면 그림 주문이 삼대밭처럼 많았고 겸재가 사용한 붓이 무덤을 이룰 정도라고 쓰여있습니다. 또한 겸재의 그림은 중국으로 사신을 보낼 때 인기 품목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특산물을 중국에 선물로 보내기도 했지만 조선의 글씨와 그림을 보내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겸재의 그림값은 중국에서 최대 100-130금에 거래되었는데 이는 당시 청나라 궁정화가 1급 월급의 10배였다고 합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은 조선에서나 청나라에서나 인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왕의 총애와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기에 위와 같은 시기 질투의 시선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겸재는 59세 모친상을 당하고 당시 조선의 법도대로 3년간 모친상을 지낸 후 다시 벼슬길로 나갑니다. 그는 양천 현령으로 임명되어 고향을 떠나게 됩니다. 양천 현령을 지내면서 겸재 정선은 당시 서울의 풍경을 담은 『경교명승첩』을 제작합니다. 이 작품은 정선이 그림을 그리고 친구였던 이병연이 시를 써서 완성한 시화상간첩으로 쉽게 말하면 당시의 교환일기 같은 것입니다. 당시 양천의 풍경이 아름다워 겸재 정선은 이곳에서 그림을 다수 남겼습니다. 양천에서 노년을 보냈던 겸재 정선은 아마 이곳에서는 편안한 시기를 보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편안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환쟁이라는 홀대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그림을 그렸던 겸재 정선은 노년기에 들어서 더욱더 아름다운 작품 세계의 꽃을 피웠던 것 같습니다. 


현재 겸재 정선은 가장 조선적인 산수화를 그린 화가로 평가됩니다. 그의 화풍을 설명할 때 '진경산수화'라는 수식어가 자주 사용됩니다. '진경산수화'는 실제의 풍경을 그린 실경 산수화에 문인화풍(남종화풍)을 접목시킨 것으로 극사실주의 회화처럼 눈에 보이는 장면을 그대로 그린 것은 아닙니다. 사진처럼 하나의 시선에서 풍경을 바라보고 원급법의 원리를 따라 구도를 잡은 것은 아닌 작가가 바라본 풍경을 여러 가지 시선으로 모아 거기에 작가의 감정을 일부 녹여 그려낸 그림입니다. 이는 다음 편 <인왕제색도>에 대한 글을 작성하면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몰락한 양반 가문의 후손으로 그가 가진 탁월한 재능으로 인해 천대를 받기도 했지만 노년의 세월에 이르러 작품 세계를 집대성한 겸재 정선의 삶을 현시점에서 상상해 보건대, 그의 삶도 녹녹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지나 조금 형편이 풀리는가 했더니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상소가 왕의 문켠에 쌓이고 기예를 천시하는 시대적인 풍조에 반하게 다작을 한 정선의 창작혼은 편안하게 양립하기 어려웠을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간 겸재 정선은 조선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겸재 정선에 호기심을 가지게 된 것은 편안함이 배어 나오는 그의 화풍 때문입니다. 보통 작품에는 화가의 면면들이 다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힘든 시기를 보낸 사람의 그림에는 고독함과 괴로움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지에서 그린 세한도를 보면 그가 지나온 외로움과 고독의 세월이 작품에서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채색도 하지 않은 오직 수묵으로만 그린 작품에서 느껴지는 한기가 세대를 초월해서 전달됩니다. 


추사 김정희, 세한도, 1844년, 23 X 69.2 cm, 지본수묵, 국립중앙박물관


반면 열정적이고 환희에 가득한 삶을 살았던 작가의 작품에는 밝은 에너지가 넘쳐흐릅니다. 저는 겸재 정선이 인품이 좋았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고즈넉하면서 안정적인 그림을 지속해서 그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겸재 정선, 인곡유거도, 18세기, 27.3 x 27.5cm, 지본수묵, 간송미술관


겸재 정선, 육상묘도, 1739년, 146.0 x 62.0cm, 비단에 채색, 개인소장




한국화를 감상하다 보면 저절로 차분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작품의 소재인 종이와 먹이 빚어내는 효과일 수도 있고 자연이라는 동양 전통의 산수화 소재가 감상자에게 잠깐이나마 쉼을 선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대대로 동양에서는 자연을 작품의 소재로 많이 다루었습니다. 좁은 화폭의 화선지 위에 자연 속에서 한없이 작은 인간을 개미처럼 작게 그린 산수화를 바라볼 때면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작구나'를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삶에서 짊어진 무게가 한순간 가볍게 느끼기도 합니다. 


제에게 한국화를 감상하는 하나의 팁이 있습니다. 저의 시선을 산수화에 그려진 인간에게 맞추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고개나 몸을 숙여도 좋습니다. 일단 감상자의 시선이 그림 속에 작게 그려진 사람과 동일해지면 작품 속의 자연은 엄청나게 크게 느껴집니다. 순간 한국화 속에 그려진 광활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옛 조상들이 화폭에 옮기고자 했던 그들이 추구했던 자연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서양화 감상에 익숙해진 현시대에 한 번쯤은 시도해 보면 재미있는 감상법입니다. 


다음 주에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인왕제색도>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이야기, 모르고 있었던 이야기를 한 자리에 모아보려고 합니다. 다음 주도 기대해 주세요! 










*이번 글의 내용은 안휘준 교수님의 『조선시대 산수화 특강』과 유홍준 교수님이 출연하신 JTBC 차이나는 K 클래스 <K 컬처의 뿌리 조선회화의 양대거장>편(2022년 8월 14일 자)을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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