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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제색도의 그때와 오늘

인왕제색도는 겸재 정선의 대표작품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가장 자주 본 한국화 작품 중에 하나입니다. 한국화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세 작품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김흥도의 <씨름>, 신윤복의 <미인도> 그리고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입니다. 이 세 작품 다 조선 후기에 제작되었습니다. 왜 조선 후기일까요?  


조선 후기는 조선의 초기, 중기 그리고 대한제국 시대와 다른 큰 특색이 있습니다. 바로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였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도 조선 후기에는 외부의 침략이 없었습니다.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하여 정국이 안정된 시기였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부가 어느 정도 쌓여야 문화예술이 융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되나 봅니다. 또 하나의 큰 특징은 당시 기행문학이 발달했다는 것입니다. 여행을 다니며 여행지를 글로 기록하고 그림으로 남기는 것이 대세였다고 합니다. 금강산은 당시에 가장 인기가 많은 관광지였다고 합니다. 또 천주교와 서양문물이 들어와서 원근법, 명암법, 투시도법 등이 수용되었습니다. 물론 서양의 화법이 지금처럼 완전히 수용된 것은 아닙니다. 수용되기 시작하여 일부 작품에 반영이 되었습니다. 이런 정치 경제의 안정기가 문화의 융성기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조선 중기에는 한국화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제작되었습니다.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 국보 216호, 1751년, 79.2 x 138.2, 국립중앙박물관



인왕산은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산으로 경복궁 우측에 위치했습니다. 경복궁의 오른쪽 날개이자 풍수지리상 우백호(우측에 있는 호랑이)라고 합니다. 바위산으로 잘 알려진 인왕산은 경복궁과 광화문 방면에서 바라보면 우람하고 육중한 그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서도 인왕산의 바위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겸재 정선이 이 작품을 그린 지 약 300년이 되어가는 지금 서울의 모든 것이 거의 다 변했지만 인왕산의 바위는 그때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인왕제색도>에서 바위는 검은색으로 채색되었습니다. 실제로 보면 밝은 회색의  바위를 왜 정선은 먹의 농도를 깊이 담아 어둡게 채색했을까요? 바로 비 온 뒤의 인왕산 풍경을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려 습기를 머금은 바위를 그리다 보니 원래의 밝은 회색으로 그리지 않고 어두운 색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당시 『승정원일기』에는 지루한 장마가 5일간 지속되다가 1751년 5월 25일이 되어서야 날이 개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겸재 정선은 산에 위치한 나무를 짙고 연한 먹으로 농담을 달리 하여 표현했고 산 언덕을 감싼 뭉게구름 같은 하얀 대기를 그림으로써 습기가 많은 순간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비가 내린 후의 인왕산의 모습을 빠르게 포착해 냈습니다.


그림의 우측 하단부에 보이는 집은 겸재 정선의 친구 사천 이병언의 집으로 많은 학자들이 보고 있습니다. 사천 이병언은 겸재 정선과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그의 죽마고우로 겸재 정선과 함께 경교명습첩』을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겸재 정선이 그림을 그리면 그 옆에 사천 이병언이 시를 썼습니다. 이를 한데 모은 것이 『경교명습첩』입니다. 사천 이병언은 10,300여 편의 시를 지은 조선시대의 천재 시인으로 겸재 정선보다 5살이 많았지만 평생 친구로 지냈습니다.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언은 둘 다 서촌(현재 옥인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인왕산을 바라보며 자란 것이지요. 그림 속의 집은 사천 이병언의 집으로 실제의 위치보다 더 위에 그려져 있습니다. 겸재 정선이 그림 속에서 잘 보이게 위로 올려서 그린 것입니다. 당시 그림을 제작할 때, 사천 이병언은 건강이 위중했다고 합니다. 친구의 병세가 깊다는 소식을 듣고 겸재 정선은 쾌유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인왕제색도>를 그렸다고 합니다. 당시 겸재 정선의 나이가 76세였습니다. 노화백이 벗을 향한 마음을 가득 담아 비 온 뒤의 인왕산을 강한 필치로 그려냈지만 그의 벗 사천 이병언은 안타깝게도 며칠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하단의 <시화상간도>에 그려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긴 수염을 가진 노인이 바로 사천 이병언입니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 겸재 정선입니다. 흐르는 냇물 앞에 앉아 화선지와 벼루를 펼치고 담소를 나누는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언은 그림 속에서도 함께 창작 행위를 하는 모습입니다.



겸재 정선, 시화상간도, 1740~1741, 비단에 담채, 29 x 26.4 cm, 간송미술관



다시 <인왕제색도>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림 속의 인왕산을 실제의 인왕산과 비교해 보면 산봉우리의 위치가 조금씩 다릅니다. 당시 카메라가 있기 이전의 시대이기에 겸재 정선이 눈으로 바라본 산의 모습을 그의 감정과 시각을 녹여서 묘사했습니다. <인왕제색도>는 한 곳에서 바라본 원근법이 반영된 그림이 아닌 인왕산의 곳곳을 바라본 다시점의 작품인 것이지요. 이렇듯 진경산수화는 실제의 풍경을 담은 실경산수화이지만 그림을 그리는 화백의 감정을 담아내 남종화풍(문인화풍)으로 그려낸 장르입니다. 정선은 이 작품 이외에도 다른 작품에서도 대상에 따라 적절히 생략하기도 하고 변형을 하여 그림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인왕산은 제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산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올라가 보기도 했고, 삼청동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과 갤러리들의 전시를 보러 가는 길에도 만날 수 있고, 십여 년 전 명동에 위치한 회사를 다닐 때 스트레스를 받아 답답한 마음을 안고 광화문까지 걸어오면 탁 트인 경복궁을 뒤로 펼쳐진 변한 없는 인왕산의 모습을 보며 많은 위로를 받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변화무쌍한 을지로-광화문 구간에서 인왕산은 별다른 말없이 육중한 바위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변치 않는 그 모습에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산의 모습 중 하나인 <수성동 계곡>은 서울특별시 도시 개발의 한 축을 그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림 속의 수성동 계곡에는 1971년에 건립된 옥인동 시범아파트 단지가 2009년까지 존재했습니다. 9개 동 265세대가 그 자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파트는 노후화가 진행되었고 2007년 대통령 경호실에서 청와대 주변의 유적지를 조사하는 과정에 기린교의 일부가 옥인동 시범 아파트 옆 암벽 옆에 존재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파트 단지를 철거하는 과정에 주민들의 시위가 있었지만 서울시는 이 자리를 겸재 정선의 <수성동>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것으로 도시 개발 방향을 확정 지었습니다.



겸재 정선, 수성동, 1751년경, 33.7 x 20.5 cm, 간송미술관



인왕산 수성동 계곡 복원 뒤의 모습



옥인동 아파트 철거 당시의 모습, 왼쪽에 보이는 돌다리가 기린교



2009년 7월부터 2012년 6월, 약 3년간 진행된 복원 사업은 1,060억 원의 예산이 투여된 복원사업이었습니다. 이중 주민들의 보상비가 950억 원이었다고 합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 속 모습처럼 수성동 계곡 돌 쌓기를 자연스럽게 하고 주변 수목과 어울리는 수종을 심는 방향으로 진행된 복원 사업을 통해 현재 수성동 계곡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본래 수성동 계곡은 조선시대부터 물소리가 맑아 명승지로 알려진 곳이었습니다. 양반들이 이곳에 찾아와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하는 것을 즐겼다는 기록이 남겨져있습니다. 또한 수성동 계곡에 흐르는 물은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원류지이기도 합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 한 장에서 시작된 복원 사업을 통해 많은 것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자연경관을 해치던 시멘트 덩어리 아파트가 철거되었고 자연은 오래전 그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수성동 계곡을 실제 하는 계곡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광화문 KT 지사 버스 정류장에서 타는 종로 09번 마을버스의 종점도 옥인아파트에서 수성동 계곡으로 변화했습니다. 저도 몇 년 전 종로 09번 마을버스의 종점 이정표를 보면서 '서울 한복판에 아직 계곡이 있다고?'를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종로를 자주 오가던 대학원생 시기에는 수성동 계곡은 역사 속에만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겸재 정선의 작품 <수성동>이 많은 사람의 기억과 서울의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는 아직 수성동 계곡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그다지 멀리 살지도 않으면서 발걸음을 옮기질 못했습니다. 날씨가 좀 더 선선해지면 아이들과 함께 방문하여 이 계곡의 예전의 모습과 지금의 변화를 설명해주고자 합니다. 옥인동 아파트가 철거되면서 발생했던 이주민과 서울시의 갈등과 그분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는 아직도 온라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후화된 아파트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화려한 주거 복합 시설이 건설되지 않고 본래 자연의 모습을 찾은 것은 정말이지 다행입니다. 인왕산은 역사적으로 한양과 서울을 이어주는 특별한 산인 것 같습니다. 우람한 바위산의 모습으로 경복궁을 호위했고 지금은 많은 시민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쉼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보 216호 <인왕제색도>의 소재가 되어 과거의 모습을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지금 인왕산의 멋진 모습이 후대에도 그대로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글은 이석우 교수님의 『겸재정선, 붓으로 조선을 그리다』와 YTN 사이언스 <조선후기 회화 르네상스를 이끈 천재 화가들 : 정선, 김홍도, 신윤복>(2017년 8월 10일자)를 참고로 하여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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