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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보다 더 극적인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자주 하던 고무줄놀이노래 중 가장 사회적인 의식을 담고 있는 곡을 꼽으라면 바로 금강산 노래일 것입니다. 저는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라는 가사의 의미를 미처 제대로 알지도 못한채 고무줄놀이 상급 단계인 어깨 높이를 뛰어넘고자 열심히 이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했었습니다. 이제야 이 노래가 통일을 염원하는 동요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익숙한 이 노래는 1998년 현실로 찾아옵니다. 1998년 11월 이산가족 826명으로 시작으로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것입니다. 금강산 관광은 당시 북한을 고향에 두었던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앞장서서 시작한 사업으로 2008년 7월 북한군이 남측 관광객을 총기로 피격한 사건으로 인해 중단될 때까지 약 20년간 진행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명산인 금강산은 관광명소로 상당히 최근까지 우리에게 각인되었습니다. 북쪽에 고향을 두신 분들과 산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다녀간 금강산은 관광사업의 운영이 중단되기까지 총 196만 명이 방문했습니다. 금강산은 사계절마다 각기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으로 불립니다. 고무줄 노래에서 나온 것처럼 일만이천 개의 봉우리를 가졌다고 알려진 금강산은 높이 1638m의 비로봉을 비롯하여 1000m가 넘는 봉우리를 100개나 넘게 가진 산이라고 합니다. 1000m가 넘는 봉우리 100개를 전부 등반해 보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잠시 궁금증을 가져봅니다.


과거로 돌아가 겸재 정선이 활동하던 18세기에도 금강산은 명산 중에 명산이며 최고의 관광지였습니다. 당시에는 금강산을 여행하고 기록을 남기는 기행문학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겸재 정선도 1711년 36세의 나이로 금강산을 처음 오른 후 그의 인생에서 총 3번 금강산을 방문했습니다. 그의 친구 사천 이병연과 함께 나귀를 타고 방문하여 약 한 달간 금강산을 여행했다고 합니다. 당시 18세기 영조가 다스리던 조선 시대는 사회적인 안정기로 외부의 침략도 부재하고 사회경제적인 부가 축적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자아의식이 팽배해졌습니다.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배경으로 중국풍과 다른 독자적인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창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선시대 초기에도 실제의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화가 존재했지만 이는 지도와 비슷하게 기록물적인 성격을 가진 그림이었습니다. 겸재 정선은 실제의 풍경에 대상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조선사람이라는 자아의식을 녹여내 조선의 풍경을 담은 진경 산수화를 완성했습니다. 중국의 명산이 아닌 조선의 명산, 금강산을 화폭에 옮긴 겸재 정선은 100여 점이 넘는 금강산 그림을 남겼습니다.


저는 하나의 소재로 100개가 넘는 작품을 그리는 행위는 화가의 집념과 끈기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자화상으로 잘 알려진 반 고흐도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을 36여 점 그렸습니다. 단순히 숫자로 비교하는 것은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겸재 정선이 한 소재로 더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물론 반 고흐는 3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여 창작을 길게 할 수 없었고 겸재 정선은 84세의 나이에 사망했기에 그가 훨씬 더 긴 기간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겸재 정선은 그의 나이 59세에 <금강전도>를 제작했습니다.



겸재 정선, <금강전도>, 국보 제217호, 기본 담채, 130.7 x 94.1 cm, 리움 미술관 소장




겸재 정선은 어떻게 36세, 37세에 다녀온 금강산 그림을 59세에 그린 것일까요? 당시 헬기, 드론, 사진이 없었던 시대였기에 겸재 정선은 자신이 다녀온 금강산의 면면을 한 군데 합쳐 극적인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실제로 금강산이 <금강전도>처럼 드라마틱하게 뾰족한 봉우리들이 한데 뭉쳐진 모습은 아닙니다. 겸재 정선이 기억하는 금강산이 나무숲과 바위숲이 빼곡히 모인 풍광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금강산에 올라 위에서 내려다본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봉우리들을 원형 구도로 한데 모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부감법으로 금강산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했습니다. 작품을 들여다보면 원형으로 조밀하게 모여진 금강산은 가운데 흐르는 듯한 곡선으로 바위산과 나무산이 나눠져 있습니다. 이에 대해 주역에 능한 겸재 정선이 무질서와 혼돈의 상태를 창조와 질서의 의미를 담은 태극의 의미를 담아 작품을 제작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겸재 정선의 자신만의 시각으로 독창적으로 표현한 금강전도와 그의 진경산수화에 대해 실학자로 잘 알려진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겸재 정선은 팔십이 넘은 나이에 촛불 아래에서 그림을 그려도 털끝 하나 틀림이 없다'라고 기록에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당대 사람들이 조선의 풍경에 대해 느꼈던 감정을 겸재 정선이 세밀하게 화폭에 담아냈던 것입니다.


금강산은 태백산, 설악산, 오대산 등이 위치한 태백산맥의 북부, 북한 측의 강원도에 위치해 있습니다. 강원도와 태백산맥은 대한민국의 장소인데 북측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니 갑자기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본래 산맥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니 분단이 된 상태에서도 당연하게 남한과 북한을 연결하는 것이겠죠. 이제는 통일이라는 단어가 예전보다 더 멀게 느껴집니다. 북에 고향을 둔 어르신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시다 보니 북측과 연결된 느낌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저는 아주 가끔 큰어머님으로 부터 개성 이야기를 듣고 합니다. 큰어머님께서 유년시절을 보낸 개성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대하소설의 한 부분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오래된 이야기처럼 다가오는 것이죠. 언제 그리고 과연 통일이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신화 속의 배경 같은 인상을 주는 금강산이 아닌 실제로 등반할 수 있는 금강산을 체험하길 바라며 이 글을 마무리 합니다.








이 글은 유홍준 교수님의 차이나는 K 클라스 <조선의 화풍, 진경산수화의 탄생. 금강전도 속의 숨은 그림 찾기>편 (2022년 8월 14일 방영)과 이석우 교수님의 『겸재정선, 붓으로 조선을 그리다』을 참고로 하여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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