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모의 방에서 잠시 얼어붙은 몸을 녹인 김서방댁은 짤막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집을 향해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긴다. 은회색 달빛을 받은 지리산 자락의 오솔길을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으로 한 발짝씩 걸어 나가며 집에 홀로 있을 세복이를 생각한다. 세복이도 분명 아버지가 섬진강물에 몸을 던졌다는 동네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을 들었을 텐데 아이에게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 '설마 세복이가 자기 아버지를 따라 강으로 간 것은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삽시간에 스쳐 지나가자 김서방댁은 감색 치마를 부여잡고 뛰다시피 종종걸음으로 집을 향해 발걸음을 빠르게 옮긴다. 지리산 기슭의 황장산 밑에 있는 작은 초가집이 김서방과 김서방댁 그리고 세복이가 가난하지만 오손도손 삶을 살아가던 터전이다. 소작농으로 단 하루도 하늘을 향해 등을 제대로 펴본 적 없이 고된 일만 하던 세복이 아버지는 비좁고 낮은 초가집에 들어오면서 넑찍한 어깨를 쫘악 피며 "아이고, 시원하구먼, 하루가 끝나니 몸도 마음도 시원허다."라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세복이 머리를 쓰다듬곤 했다.
세복이를 낳고는 세복이 아버지와 특별한 감정의 교류 없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갔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일절의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소작농과 소작농의 아낙네의 삶은 잡일과 허드렛일의 일상으로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고 살아가기면 감사한 날들이었고 힘든 노동 끝에 곯아떨어져 잠을 자는 순리에 따라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내 몸뚱이 피곤한 만큼 세복이 아버지도 힘들겠지.'라며 남편을 십분 이해하는 부인의 삶이 덕성스러운 성품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곤 했다. 그런데 젊은 남자와 정분이 났다니.... 그간 김서방댁을 바라볼 때마 혀를 끌끌 차는 몇몇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건 늘 본인의 초라한 행색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애써 그 시선을 피했었다. 소장농과 그 아낙네의 초라한 행색은 스스로 쉽사리 바꿀 수 없는 표식이었다. 늘 같은 옅은 회색빛의 저고리와 감색 치마를 입고 다녔지만 그래도 이 옷이라도 입을 수 있었기에 여름에는 더위를 겨울에는 한기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주모가 말한 구례 최참판댁과 관기 사이에 낳은 그 젊은 남정네는 누구란 말인가...'
구례의 관기가 빼어난 외모와 예기를 지녔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가야금 병창소리에 맞춰 추는 부드럽고 작은 포물선을 그리는 고운 춤사위은 여럿 사내들의 정신을 빼놓는다고 했다. 게다가 그 관기는 서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들었다. 관기가 그린 화조도를 본 사람들은 그림 속의 꽃은 살아서 벌을 유인하고 새는 자신의 날개를 뻗어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이라고들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천한 기생의 삶이 아닌가. 지금까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며 자식을 키우는 김서방댁의 일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가는 많은 생각 틈바구니 속에서 김서방댁은 지리산 아래에 위치한 황장상 기슭의 오늘따라 더 초라해 보이는 움막 같은 초가집에 당도했다. 삐거덕, 틀이 맞지 않는 초가집의 나무문을 조심스레 열어본다. "세복아, 세복이 안에 있노?"
야트막한 이불속에 웅크린 둥근 형상의 흐느낌이 마치 작은 새가 어미를 찾아 울듯 가냘프게 배어 나오고 있다. 신음과 같은 흐느낌이 김서방의 몸을 다시 한번 차갑게 얼어붙게 만든다. 달빛마저 비켜가 버린 작은 초가집에서 김서방댁은 흐느끼는 형상을 향해 조심스럽게 한 마디씩 건네본다.
"세복아, 내 너에게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만. 니도 들었제? 아버지가 저리 섬진강을 따라가버린 것을. 그래도 남은 우리라도 어떻게 살아야 겠지 않겠냐. 세복아, 내는 너를 부끄럽게 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너를 두고 느그 아버지를 따라갈 일도 절대로 없을 것이다. 내게는 니 밖에 없다. 알긋냐? 세복아, 내 말을 알아먹겠느냐?"
이불속에서 흐느끼던 작은 형상은 서서히 울음소리를 그친다. 동네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과 두려움 속에서 의지할 것은 얇은 이불 밖에 없던 세복이는 고개를 빼꼼 빼어내고 지 어미를 바라본다. 작은 새가 어미 새를 바라보듯, 바라볼 대상도 의지할 상대도 어미 밖에 없는 세복이는 눈물을 훔치며 "예"라고 짧은 대답을 뱉어낸다.
"근데...예...어무이..."
"와?"
"아니라예. 아무것도 아니라예"
마음속에 숨겨둔 질문조차 꺼내지 못하는 세복이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김서방댁의 마음은 다시 한번 갈기갈기 찢어진다. '내가 못나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인가.'라고 스스로를 탓해보지만 그러기엔 당장 내일부터의 삶에 눈앞이 캄캄하다. 가계 경제를 대부분 감당했던 세복이 아버지가 사라지고 나서의 삶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기에 어디에 가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서방댁이 해오던 허드렛일들은 대부분 세복이 아버지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리산부터 불어 내려오는 차가운 바람의 한기로 가득 찬 초가집에서 세복이와 김서방댁은 서로를 꼭 부둥켜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잔인하게 어두운 밤의 시간이 비켜가기를 기다린다.
'내일 다시 주막에 가봐야겠다. 뭐든 도울테니 일거리를 나눠달라고 주모에게 사정해 봐야겠다'. 당장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화개장터의 주모와 하서방댁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긴장이 풀렸는지 갑작스럽게 잠이 쏟아진다. 채찍을 맞으며 장터를 행해 짐을 옮기는 당나귀처럼 고통스러운 마음의 짐을 지고 있는 김서방댁은 곧이어 정신을 잃고 잠이 든다. 세복이도 지쳐 쓰러진 어미를 보며 두 눈을 감는다. 달빛마저 비켜간 황장산 아래의 초가집은 어두운 밤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