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으리 배 이야기

배나무를 읊어 아들과 조카에게 보이다(詠梨樹示子姪)

by 이탁


농암집(聾巖集)은, 농암 가문, 더 거슬러 영천이씨 소윤공파(永川李氏 少尹公派) 내력을 찾는 이에게는 보물 창고입니다. 서술 기록은 물론, 농암의 시에도 많은, 가문 초기 정보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배나무를 읊어 아들과 조카에게 보이다(詠梨樹示子姪)’라는 시도 그렇습니다.



이 시는 특별히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소재도 그렇고, 내용도 특별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를 먼저 한번 보십시오. 농암집 권 1에 실려 있습니다.


성 모퉁이 거친 땅 몇 이랑에(負郭荒田數頃微)

고조 증조 때 처음 터 잡아 집 지었네(高曾始卜宅於斯).

양씨(楊氏)의 청백한 가풍이 어떠한가(何如楊氏傳淸白)

집 뒤에 배나무 한 그루 전해 왔다네(家北流傳一樹梨).

-이현보, 배나무를 읊어 아들과 조카에게 보이다(詠梨樹示子姪)



특별해 보이지 않는 이 시에, 그러나, 분천 영천이씨의 내력, 그리고 정신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아들과 조카에게 보인다는 제목이, 이현보가 이 시를 읊은 이유와 안에 담은 내용의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데, 이제, 이현보가 아들과 조카에게 전하고자 하는, 집안 내력과 정신을 한번 보겠습니다.










1. 고조와 증조가 터 잡아 집 지었네



먼저, 기와 승은 분천 영천이씨 내력을 적었습니다. 시의 고조가 이헌(李軒)이고, 증조가 이파(李坡)입니다.


❙❙ 기(起) – 성 모퉁이 거친 밭 몇 이랑에 ❙❙ 분천(汾川)에 처음 잡은 집터 위치를 ‘성 모퉁이(負郭)’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현보가 그렇게 적은 이유가 있습니다.


분천은 당시, 예안현 북쪽,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외진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황전(荒田)으로 이어지는데, 황전은 거친 밭입니다.


황전은 고조와 증조가 분천에 개간한 토지이거나, 이전에 인근 주민이 드나들며 개간해 사용하던 토지일 것입니다. 관련하여, 후대 기록 하나를 보겠습니다. 사천재사중건기(沙川齋舍重建記) 한 대목입니다.



‖가시를 쳐내고 미개지를 개간하여 몇 칸 집을 지었다(披荊榛開天荒結屋數架).



처음 분천 당시를 표현한 단어가 천황(天荒)입니다. 천황은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전인미답의 미개척지 아니겠습니까? 이 앞에는 또, 이헌이 ‘하늘이 주인을 기다려 감추어둔 곳(天藏好丘以待主人)’이라 말하였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거친 밭(荒田), 미개지(天荒), 하늘이 감추어둔 곳(天藏), 당시 분천은 예안현의 북쪽 외진 곳이고, 사람 발길이 미치지 않은 미개지였습니다. 주인도 없었습니다.


후술하지만, 그는, 세상 마음을 끊어(無意於世-족보), 늘 아름다운 산수 은거지를 찾고 있었습니다. 주인도 없고 인적도 없는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곳, 이헌은 분천의 입지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그 감격이 얼마나 컸으면, 하늘이 주인을 기다려 감추어둔 곳이겠습니까?


분천을 발견할 당시, 그는 당시 예안 서쪽 사천(沙川)에 살았습니다. 거리상, 분천을 오갈 수 있었습니다.


주인 없는 분천의 황전(荒田), 인근 주민이 드나들며 개간한 토지일 수도 있지만, 분천을 발견하고 이주를 결심한 그가, 이주 기반 마련을 위해, 분천을 오가며, 조금씩 일군 황무지 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

초기 분천 이야기를 더 이어가기 전에, 잠깐, 사천재사중건기(沙川齋舍重建記)를 보고 가겠습니다. 후에 사천재사를 중건하며 지은 기문인데, 1788년에 외손 이급(李級)이 지었습니다. 사천재사가 이헌의 묘소를 관리하는 재사(齋舍)입니다.

[자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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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지 않았지만, 분천의 당시 상황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가 마을 뒷산 계곡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질그릇을 굽던 가마터입니다. 뒷산 계곡에 질그릇을 굽던 가마터가 있었고, 사람들은 그곳을, 독을 짓는 골짜기, ‘독짓골’이라 불렀습니다. 분천을 아는 사람은, 단번에 어디인지 알 것입니다.


분천 아이들은 흔히, 그 산에서 나무를 하고, 나물을 캐고, 봄이면 소나무 여린 가지 속살을 벗겨 먹었습니다. 놀이터이고 일터였는데, 계곡 들어가는 초입에 크고 작은 질그릇 파편들이 있었던 것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독짓골’은 한자로 음차(音借)되어 독곡(獨谷)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옛 문헌에는 모두 이 독곡으로 표기되어 나옵니다.

마침, 분천헌연도(汾川獻燕圖)에 독곡 능선이 나와 있어 한번 보고 가겠습니다. 오백 년 전 독곡 능선인데,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림은 1526년에, 이현보가 고향에서 부모님을 위해 축수연(祝壽宴)을 하는 장면입니다.

[자료 2]




그림의 1이 독곡 능선입니다. 그 능선 우측이 ‘독짓골’입니다. 그림 우측, 사람들이 위에 둘러앉아 술잔을 나누고 있는 큰 바위가 농암(聾巖)이고, 바위 좌측 중턱의, 필로티 구조의 건물이 애일당(愛日堂)입니다. 바위 지형에 맞추어 지은 애일당 최초 모습이 저렇습니다.


‘독짓골’을 지나쳐 보지 않아야 하는 것은, 바로 도산(陶山)이라는 지명이 여기에서 유래하기 때문입니다.


도산은, 도산(陶山)이라는 산의 이름이 바로 지명이 된 것인데, 도산(陶山)의 유래가 바로 이 ‘독짓골’입니다. 도산(陶山)을 우리말로 풀면, ‘질그릇 산’이거든요. 이황의 도산잡영(陶山雜詠)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도산이,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세상에 알려진 도산이, 기실, 그 명칭의 뿌리가 분천의 뒷산 계곡 독짓골이라니, 분천 사람으로 뭔가 새삼스러운 감회 하나를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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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천에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지만, 강 건너에 오래된 마을이 있었습니다. 의인(宜仁)입니다. 이현보 당시에는 폐현(廢縣)이 되어 있었지만, 고려시대에는 현(縣)이었고, 병사들이 주둔하였습니다. 강변 토지도 넓어, 마을 규모가 꽤 크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훗날, 의인은, 강 건너 도산 지역이 번창하며 상대적으로 중심에서 벗어나게 되고, 지금은, 수몰로,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 지역이 되었지만, 사실, 예안현의 북쪽, 도산 인근에서는 가장 오래된 마을일 것입니다.


의인 마을에 오래된 큰 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임강사(臨江寺)입니다. 이현보가 말년 거주지로 사용한 곳인데, 1605년, 그 유명한 을사년 홍수에 쓸려 내려갔습니다. 선성지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 승(承) – 고조와 증조가 처음 터 잡아 집 지었네 ❙❙ 승이 아주 중요합니다. 얼핏,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영천이씨 초기 분천 이주와 관련된 결정적인 사실(史實) 두어 가지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상기하면, 이 시의 고조가 이헌(李軒)이고, 증조는 이파(李坡)입니다. 이헌은 영천이씨 분천 입향조(入鄕祖)이고, 이파는 그의 장남입니다.




먼저, 집을 지은 것을 이야기하며, ‘고조가 지었다’라고 하지 않고, ‘고조와 증조가 지었다’라고 한 것을 잘 보십시오.

관련하여, 이현보의 기록 하나를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원석헌연시(元夕獻筵詩) 병서의 내용입니다.


‖나의 분천 고가(故家)는, 고조와 증조로부터 조부에게 전하고 부친에 이르기까지 백여 년이고, 나에 이르러 또 40년이다(吾汾川故家自高曾傳祖及父己百餘歲及我之身亦且四十年).



위 기록의 ‘분천 고가(故家)’가, 시에서 말한 고조와 증조가 지은 집입니다. 이현보는 이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고가는 선대에서 내려온,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고가 유래의 표현을 주의해 보아야 하는데, 고가의 시작을 ‘고조와 증조로부터(自高曾)’라고 적고 있습니다.


잘 보십시오. 같은 집을 표현하며, 시에서는 ‘고조와 증조가 처음 터 잡아 지었다’라고 표현하고 있고, 원석헌연시 병서에서는 이 집의 유래가 ‘고조와 증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적었습니다.


두 기록이 보여주는 고가의 시작 상황이 명확합니다. 이 집을, 터 잡아 처음 지은 것도 이헌과 이파이고, 지은 후, 처음부터 두 사람은 또 같이 살았습니다.


혹, ‘고조와 증조’를 ‘선대, 조상’ 정도의 포괄적 의미를 가지고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다른 여러 기록을 참고하면, 이는 글자 그대로 ‘고조와 증조’가 명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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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선성지(宣城誌) 기록을 또 보십시오. 위 사실이 한층 더 뚜렷해질 것입니다. 사천(沙川)에 처음 산 사람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사천(沙川), 이헌이 영천 향족의 후예로 여기에 와 살면서, 예안현 사람이 되었다. 장남 파(坡)가 분천으로 옮겨 살았고, 차남 오(塢)는 사천에 계속 살았다(李軒以永川鄕裔來居于此遂爲縣人長子坡移卜汾川次子塢因居沙川).



이헌이 사천(沙川)에 와서 예안현 사람이 되었다고 적은 다음, 이파가 분천에 옮겨 살았다고 적었습니다. 선성지 다른 부분에는, 이헌이 분천에 옮겨 살았다는 기록이 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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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분천을 처음 발견한 것은 이헌입니다. 분천을 발견하고, 하늘이 나를 위해 감추어두었다고 하였으니, 분천 이사를 결정한 것도 이헌일 것입니다.


그러나, 분천에 땅을 일구어 토지를 만들고 집을 지은 것은, 이헌과 이파 부자가 같이 하였고, 분천에 들어온 것도 두 사람은 같이 들어왔습니다.

위 선성지 기록을 더 충실히 해석하면, 이파가, 아버지 이헌을 모시고 분천에 들어왔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정황으로 보면, 황무지 분천을 개간한 실질적 중심도 아마 이파였을 것입니다.


초기 분천을 시작하는 상황에서 이파의 역할은 상당하였습니다. 실질적 실무의 중심은, 오히려 이파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후술하는 분천의 시거(始居) 상황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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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분천으로 이사한 뒤, 사천에는 차남 이오(李塢)가 남았습니다. 사천은 이헌이 영천에서 처음 이주해 들어온 곳입니다. 위 기록에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적을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이헌은, 고려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 바로 영천을 떠나 사천으로 들어왔습니다. 사천은 흔히, 모란이라는 지명이 더 익숙합니다.


모란에 있는 사천재사(沙川齋舍)를 보고 가겠습니다. 지역에 내려오는 말로는, 이헌이 죽었을 때 이파와 이오가 시묘하던 여막(廬幕)이 이 집의 기원이었다고 합니다.


[자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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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과 이파의 분천 이주는, 이헌의 두 아들이 분가한 모습이기도 하고, 세거지를 확장해 나간 모습이기도 합니다. 영천이씨 소윤공파(永川李氏 少尹公派)가 사천과 분천, 두 세거지를 가지게 된 내력입니다.

두 연고를 기점으로, 영천이씨 소윤공파는 이후 인근으로 더 주거지를 넓혀 나갔습니다. 이파의 후손은 연곡(燕谷), 운곡(雲谷) 등지로 퍼졌고, 사천에 남은 이오는 후에 가야(檟野)로 이사하여, 그 후손이 능곡(陵谷), 우곡(愚谷), 구도실(道谷) 등지로 퍼져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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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가, 아버지 이헌을 모시고, 분천으로 왔다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분천에 들어온 뒤, 초기 분천 생활을 주관한 사람도 이파일 것입니다. 선성지 기록을 먼저 한번 보십시오.


‖분천(汾川), 이파가 시거(始居)하였는데, 연대와 벼슬이 다른 마을의 갑절이다(李坡始居年代爵祿倍於他村)



분천에 처음 거주한 사람, 시거자(始居者)를 이파로 적었습니다. 분천의 집을 이헌과 이파가 같이 짓고, 들어온 사람도 두 사람이 같이 들어왔는데, 그러면 보통 아버지를 시거자로 적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시거자로 적었습니다. 이는, 아들을 시거자로 적을 만한, 그들의 초기 분천 정황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아들이 시거자가 된 내막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족보에 있습니다. 바로, 이헌이 세상에 뜻이 없었다는 것입니다(無意於世).


그는, 벼슬에서 은퇴하여 낙향한 뒤, 세상에 뜻을 잃고, 은자(隱者)의 길을 걸었습니다. 영천에서 사천으로 온 것도 그렇고, 사천에서 다시 분천으로 이주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마음 근본은 더 깊은 자연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意在入林之密而入山之深-사천재사중건기).

그가 분천에서 사용한 호도 낙은(洛隱)이고, 분천 집에 내 건 현판도 낙은유거(洛隱幽居) 아니겠습니까? 낙은은 낙동강 주변에 은거하는 사람이고, 유거(幽居)는 소박하고 그윽하게 사는 것입니다.


모든 기록과 정황이, 분천 초기 생활의 전면에 이파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농암집, 선성지, 족보, 사천재사중건기 기록이 모두 그렇습니다.


이파는, 그렇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닫고 나온 관직의 문을 다시 열고 나가 의흥현감(義興縣監)을 하였습니다. 사천의 대부호 신천부사(信川府使) 김지로(金智老)와 사돈을 맺었습니다.

분천을 처음 발견하고 초석을 놓은 것은 이헌이되, 그 초석을 더욱 튼튼히 하고, 기둥을 올린 것은 이파입니다. 농암집에도, 이현보는 증조 이야기를 곳곳에 적어 놓고 있기도 합니다.


이파의 교지(敎旨) 하나를 보고 가겠습니다. 1543년, 그의 증손 이현보가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면서, 1546년, 이파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가 추증된 교지입니다.


[자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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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은 사망 후, 분천에 묻히지 않고, 사천에 묻혔습니다. 먼저 사망한 그의 아내도 사천에 묻혔습니다.

알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분천에 묻히지 않고 사천에 묻힌 내막은 알 수 없습니다. 이헌이 분천에 들어와 사망한 것은 분명한데, 그의 선성이씨(宣城李氏) 아내가 졸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아, 혹 사천 시기에 사망하여, 거기에 묻혔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망 당시 이헌의 분천 연고는, 그가 가졌던 사천 연고보다는 약했을 개연성입니다. 그 연고의 강한 끈은, 아내의 무덤일 수도 있고, 분천에 들어오기 이전 사천의 오랜 생활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에서, 고조와 증조가 터 잡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놀랍게도, 두 사람이 처음 집을 지은 시기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전술한, 원석헌연시 병서를 다시 가져와 보겠습니다.


‖나의 분천 고가(故家)는, 고조와 증조로부터 조부에게 전하고 부친에 이르기까지 백여 년이고, 나에 이르러 또 40년이다(吾汾川故家自高曾傳祖及父己百餘歲及我之身亦且四十年).


고가의 존속 기간이 나옵니다. 고가(古家)가 아니라, 고가(故家)인 점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대대로 살아온 집입니다.


이현보는 이 고가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고조와 증조로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까지 백 년, 그리고 이후 본인이 40년을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글을 기록하는 1554년 당시, 140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집을 처음 시작한 것은 1414년입니다. 그때 집을 지은 것이지요. 정확한 연도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1414년 무렵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전술하였지만, 시에서, 이 집은 황전(荒田)에 터 잡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처음 들어올 때 지은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414년 무렵은 곧 분천 역사의 시작 시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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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시작과 마을의 시작, 저 집, 저 마을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뭔가 새삼스러운 감회가 하나 생깁니다. 무슨, 인생의 아득한 뿌리를 발견한 기분입니다.

사천재사중건기를 보면, 이헌은 이 집을 짓고, 낙은유거(洛隱幽居)라 현판을 걸었다고 합니다. 그 낙은유거의 시작이 1414년인 것입니다.


전술하였지만, 이헌은 관직에서 사퇴하고, 고려 말, 영천에서 사천으로 이사해 예안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20여 년 후 1414년 무렵, 다시, 장남 이파와 함께, 분천에 집을 짓고 같이 이사해 들어왔습니다. 바로 낙은유거의 시작이고, 분천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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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는 이 낙은유거를 고가로 물려받아 살았습니다. 그가 죽고, 불천위가 되면서, 이 고가는 농암종택이 되어,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인한 수몰로 이전할 때까지, 저 자리에 있었습니다.


낙은유거에서 농암종택으로 이어진 저 고가의, 지은 후 550년 후의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1960년대 초, 농암 16대 종손 이용구(李龍九)가 중수한 농암종택입니다. 사진 우측 끝 건물이 사당이고, 사당 뒤, 높은 뒷산 앞에 겹쳐 보이는 야트막한 산이, [자료 2]에 동그랗게 그려진, 독곡 능선입니다.

[자료 5]




600년 세월입니다. 사이에 보수(補修)와 중수(重修)를 거치고, 수몰로 가송(佳松)으로 옮겨가지만, 유구한 낙은유거, 농암종택 긍구당 역사입니다.


❚ 여담 – 긍구당(肯構堂) ❚ 이제 긍구당을 한번 보겠습니다. 여담으로 적지만, 결코 여담일 수 없는 긍구당 이야기입니다. 원석헌연시 병서의 다른 부분에,



‖내가 서울에서 벼슬을 살며, 관아를 집 삼아 드나들어 나그네 같아, (집이) 퇴락해 기울고, 기둥은 벌레가 먹었다. 아이 문량이 공인을 불러 중수하였는데, 마침, 올해 이날 여기에 자리를 마련해, 같이 새해 경사를 맞이하였다. 내가 기뻐, 그 집을 긍구당이라 이름하였다(我仕宦于京以官爲家或出或入有同逆旅傾頹殆盡幹蠱之兒文樑主之始倩工修之適今歲日設席于此共迎新慶余喜而名其堂曰肯構).


이현보가 이황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현판을 붙인 집을 객실(客室)이라 표현하고 있어, 손님을 맞는 사랑 별채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현보가 그 집 이름을 긍구당이라 한 이유는 위 내용에 나와 있습니다. 집의 중수를, 장남 이문량(李文樑)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긍구(肯構)는, 긍구긍당(肯構肯堂)의 준말로, 아버지가 시작한 일을 아들이 계승하는 것입니다.


윗대 유업을 잇는 것인데, 살아온 집을 아들 이문량이 중수한 것이 조상의 업을 잇는 모습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는 또한, 후손들이 조상의 업을 이어가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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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가 죽고, 그가 효절공(孝節公) 시호를 받으면서 불천위(不遷位)로 사당에 모셔지자, 이 집은 농암종택(聾巖宗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긍구당은 자연스럽게 농암종택 당호(堂號)가 되었습니다.


불천위는, 4대가 지나도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영원히 사당에 모시는 것인데, 겨울, 눈 내린 긍구당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자료 6]



긍구당의 시작은 1554년입니다. 낙은유거 시작은 1414년이었습니다. 보수(補修)와 중수(重修), 그리고 이건(移建)을 거치며, 600년 세월, 긍구당은 농암종택의 중심, 농암종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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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구당 현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사실, 이 부분도 꼭 밝혀 말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호가 영천자(靈川子)인 신잠(申潛)이 썼다는 정도를 압니다. 다음 현판입니다.


[자료 7]




신잠이 썼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제 생각에, 거의 기념비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신잠은 시서화(詩書畵)의 삼절(三絶)로 불린 뛰어난 문인 예술가였고, 일반 작은 글씨는 몇 점이 전하지만, 대자(大字) 글씨는 이 현판 글씨가 유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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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잠의 인생과 예술, 특히 그의 예술은, 이양재(李亮載)가 쓴 ‘아차산 아래의 선비화가 영천자 신잠’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신잠은 빼어난 예술가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설중기려도(雪中騎驪圖)를 보시고, 2025년에 포스코 미술관에서 ‘오백 년 만에 돌아온 조선 서화’에서 소개한 그의 묵죽도(墨竹圖)를 한번 보십시오. 선비의 취미 수준이 아니라, 최고 수준의 문인 예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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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문 배경도 화려합니다. 화려 이상입니다. 그는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이고, 한명회(韓明澮)의 외증손입니다. 그의 아버지 신종호(申從濩)는 세종의 손서(孫壻)이고, 그의 형 신항(申沆)은 성종의 사위입니다. 어느 정도인지 가늠될 것입니다. 그가, 일반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었다는 것이 미담이 될 정도의 가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인생, 특히 정치 인생이 불우하였습니다. 불우의 시작은 조광조(趙光祖)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가 관직에 나간 과거가 현량과(賢良科)인데, 그의 행장(行狀)에는 신과(新科)라고 되어 있습니다.

현량과, 어진 인물을 추천한다는 것이지만, 사림 인물을 조정에 들이려는 조광조의 정치적 목적이 있던 과거제 아니겠습니까? 합격자에게 6품, 7품 관직을 바로 주었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신잠이 이 첫 시험 합격자 28명에 포함되어 관직에 나간 것입니다. 1519년 4월입니다. 예문관 검열(檢閱)로 시작했지만, 곧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제학으로 내정된 것도 같은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미처 부임하기도 전, 그해 11월, 세상이 아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고, 그도 조광조 파당(派黨)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갓 합격한 벼슬 초년생이라 목숨은 건졌지만, 현량과 자체가 공격받으며, 파방(罷榜), 즉 합격 취소를 피할 수 없었고, 파직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무렵, 그가 읊은 시를 한번 보십시오.


‖홍패는 이미 환수되고 백패도 잃었으니(紅牌已收白牌失)

한림과 진사 모두 허명이로다(翰林進士摠虛名).



홍패(紅牌)는 붉은 종이에 써 주는 대과 합격증이고, 백패(白牌)는 흰 종이에 써 주는 소과 합격증입니다. 파방되며 홍패가 환수되었고, 이후 얼마 뒤, 도둑이 들어 백패까지 잃어버렸습니다.


한림과 진사 모두 허명이로다, 당시 그의 나이가 30대 초반이었습니다. 가문과 재능을 모두 갖춘, 전도유망한 한 젊은이의 낙심과 절망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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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나쁜 일이 하나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2년 후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이름이 엮이며, 그의 정치 인생은 완전히 몰락하였습니다.

장흥(長興)에 유배를 갔고, 그렇게 시작된 유배 생활이 무려 17년이 이어졌습니다. 아마, 조선 오백 년에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유배 기간일 것입니다. 3, 40대 인생 황금기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인생을 잃은, 그 실의와 좌절감이 어땠을지 짐작도 못 하겠습니다. 다른 것을 할 수 없는 유배지에서 그는, 조금씩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이웃에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디 제대로 내놓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람이 묻히며, 그의 예술도 같이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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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또, 주머니 속 송곳이라고, 물이 스며들 듯, 그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져, 17년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자, 그의 문간에는, 비단을 싸 들고 그의 글씨와 그림을 받으려는 사람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글씨는 초서와 예서를 잘 썼고, 그림은 난초와 대나무를 잘 그려,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묵죽에 뛰어났다’라고 되어 있고,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도 ‘묵죽과 포도를 잘 그렸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의 묵죽(墨竹) 그림은 이황도 찬탄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문집에는 신잠의 묵죽을 읊은 시가 세 편이 있는데, 한 구절이 다음과 같습니다. ‘영천자의 묵죽에 붙여(題靈川子墨竹)’입니다. 1553년에 쓴 것입니다.



‖소상강 운치 그려낸 오묘한 필치는 모르거니와(不知妙墨傳湘韻)

바람과 서리 온 집안에 가득함만 느낄 뿐(唯覺風霜滿一堂).



예술에 높은 안목을 가진 이황입니다. 칭찬하지만, 과장하여 말하지 않는 것이 이황입니다. 그가, 그 오묘한 경지를 알 수 없다고 적고, 대나무 그림에서 나오는 바람과 서리 기운이 온 집에 가득함을 느낀다고 적었습니다.


문득, 500년 만에 일본에서 돌아왔다는, 포스코 미술관에서 전시하였던 그의 묵죽도 대련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이황이 본 그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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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긍구당 현판 글씨를 쓴 것은, 그의 마지막 관직인 상주부사(尙州府使) 시기입니다. 1537년 유배에서 돌아온 그는, 태인현감(泰仁縣監)과 간성군수(杆城郡守)를 거치고, 1552년 상주부사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리고, 1554년 봄에 긍구당 현판 글씨를 쓰고, 그해 12월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긍구당 글씨는, 그의 마지막 대자(大字) 글씨이자, 유일하게 남긴 대자 글씨입니다.


그의 그림은 몇 점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글씨는, 대자 글씨는 이 긍구당 현판이 유일합니다. 이것이 아니면, 그의 서예 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긍구당 현판의 신잠 글씨, 기념비적이지 않습니까? 예술적으로도, 쓴 이의 인생으로도, 그 희귀한 유일성에서도, 내용을 알고 보면, 한 번 더 음미해 보게 될 것입니다.




여담이 길었습니다. 다시 본 글로 돌아와, 이제, 기, 승의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기는, 이헌과 이파가 들어올 당시, 분천 상황을 적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황폐한 곳이었습니다. 부곽(負郭), 황전(荒田)이 모두 그런 단어입니다.


고조와 증조가 터를 잡아 집을 지었다는 승에는, 두 가지 함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 집을 지은 시기가 1414년 무렵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집은 이헌과 이파가 같이 지었고, 두 사람이 같이 이사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초기 분천 생활을 이파가 주관하였다는 내용도 적었습니다.





2. 배나무 한 그루 전해 온다네.


전과 결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전과 결은 ‘나으리 배나무’에 담긴 집안 정신을 밝혀 말하였습니다. ‘아들과 조카에게 읊어 보인다’에서 보듯이, 그 말하는 취지가 명확합니다. 알고 이어가라는 것입니다.



❙❙ 전(轉) – 양씨(楊氏)의 청백한 가풍 ❙❙ 먼저, 전입니다. 전은 중국 후한의 양진(楊震) 가문 이야기입니다.

양진은 후한의 대학자이고, 청백을 대표하는 관료입니다. 여러 방면에 통달해 ‘관서의 공자((關西孔子)’라 불리었는데, 후손 대대로 청백리(淸白吏)가 배출되어, 중국의 대표적인 청백리 가문으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양진의 청렴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꽤 알려진 이야기가 4지(四知)입니다. 양진이 동래태수(東萊太守)로 부임하는 도중, 왕밀(王密)이라는 사람이, 이전 은혜의 감사 표시로, 금 열 근을 몰래 가져와 바쳤는데, 오간 대화가 이렇습니다.


“지금은 한밤중이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暮夜無知).”


“하늘이 알고(天知), 땅이 알고(地知), 내가 알고(我知), 자네가 아는데(子知)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가?”


양진의 이 사지(四知)는 이후, 관리의 청렴결백 상징처럼 사용되었습니다. 그 청백이 얼마나 사표가 되었는지, 이천년이 지난, 지금 중국도 그의 고향에 그의 박물관을 지어, 사람들의 사표로 삼는다고 합니다.


그 박물관 이름이 ‘양진의 청렴한 정치 박물관’, 양진염정박물관(楊震廉政博物館)입니다. 그 마을 이름도 사지촌(四知村)입니다.


[자료 9]



사지가 세상 사표가 되면, 그 반대는 또 반면교사로, 하지 말아야 할 사표가 되겠지요. 금을 전하며 왕밀이 말하였던 ‘밤중이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라는 모야무지(暮夜無知)는 이후, 은밀한 청탁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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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벗나가는 이야기인데, 양진 가문에 우리가 익히 들었던 한 단어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바로 계륵(鷄肋)의 주인공 양수(楊脩)입니다. 조조의 참모 양수 말이지요.


전장에서 곤경에 처한 조조가 계륵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 말의 속내를 알고 퇴각 짐을 쌌다가, 속내를 들킨 조조의 분노를 사서 죽임을 당했다는 그 양수가 바로, 양진의 증손자입니다.




이현보가 양씨 가문의 청백(淸白)을 소재로 가져온 것은, 물론, 집안의 청백한 가풍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하며, ‘어떠한가(何如)’라고 적습니다. 거기에 담긴 마음은, 그렇습니다. 양진 가문의 청백은 대단하다, 그러나 대대로 내려온 우리 집 청백도 자랑할 만하다, 그런 의미입니다.


이현보가 말하는 우리 집안의 청백, 그것이 결에 나오는 배나무에 담겨 전해오는 정신입니다.


❙❙ 결(結) – 배나무 한 그루 대대로 전해 오네 ❙❙ 이제, 결의 배나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것이 이현보가 아들과 조카에게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우리는 사실, 이 부분을 유념해야 합니다.


어쩌면 모두, 한 그루 배나무를 심어야 하고, 취지를 공유해, 배나무 심기 운동이라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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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뒤뜰 배나무에 청백(淸白)의 정신이 있다는 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이야기일까요? 이현보가 이 시에 덧붙여 놓은 설명을 한번 보겠습니다.



‖배나무 이름이 ’진사배(進賜梨)‘인데, 증조 의흥공(義興公)께서 좋아하여 이름을 붙였다. 그 뒤에도 진사라는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고, 배나무 또한 열매가 많이 달려 대대로 전해져 맛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말한 것이다(梨名進賜梨曾祖義興公所嗜而名之其後進賜之名不替而梨亦尙繁其實世世傳嘗故云).


증조 의흥공(義興公)이 이파입니다. 이파가 이 배나무를 좋아하여 ’진사배(進賜梨)‘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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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가 집 뒤 배나무를 진사(進賜)로 이름 붙여 불렀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이파는 무슨 의미로 그렇게 불렀을까요? 이 부분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핵심 화소입니다.


진사(進賜)는, 우리말 ’나으리‘를 한자로 적은 것입니다. 이두(吏讀) 방식인데, 이두는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해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이파가, 저 배나무를, ’나으리‘라고 불렀다는 것이지요.

이야기를 잇기 전에, 진사(進賜)와 관련된 옆 이야기 하나를 잠깐 하고 가겠습니다. 요즘 천만 관객을 모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화제이고, 그 영화 첫머리에 사육신이 고문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 진사가 있습니다.


그 장면에서, 고문을 받던 성삼문과 박팽년이 세조에게 하였다는 호칭이 ’나으리‘인데, 그 한자 표기가 바로 진사입니다. 성삼문이 “내 집 창고에 나으리 준 녹봉이 모두 있을 것이오”, 박팽년이 “나는 나으리 신하가 된 적이 없소”라고 하였다는, 그 ’나으리‘의 기록이 모두 진사(進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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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으리 배‘로 돌아와서, ’나으리‘는, 보통 지체 높은 분을 통틀어 하는 말이지만, 애초는 정3품 이하 당하관을 이르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이두로 쓰인 진사도 그런 해석이 가능합니다. 벼슬길에 처음 나아가는 사람이지요.

요컨대, 이파가 이 배나무를 ’나으리‘라고 부른 것은,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의미, 혹은 벼슬아치 자체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더해 우리는, 이 나무가 배나무라는 사실을 지나쳐 보면 안 됩니다. 나으리 감도 아니고, 나으리 밤도 아니고, 나으리 배입니다.


배나무가 벼슬아치의 청렴결백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배의 하얀 속살이 그렇고, 그 고결하고 아름다운 꽃이 그렇습니다.

조선의 왕이 청백리에게 배를 하사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을 내가 안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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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이파가 이 배나무를 ’나으리 배‘라고 부른 것은, 청렴한 벼슬아치, 즉 청백리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것은, 의흥현감을 지낸, 그 자신의 지향이기도 하고, 후손에 대한 그의 기대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는 후손들이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나가기를 원하였고, 관직에 나가면 청렴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현보는, 그 배나무 이름이 바뀌지 않고 내려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의미가 명확합니다. 증조부 이파가 지향하였던 그 청백리 정신, 그것이 집안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풍(家風)이라는 것이지요.


오래된 배나무 이야기가 나와서, 마이산 아래에 있는, 천연기념물 청실배나무 사진을 한번 보고 가겠습니다.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해, 수령이 육백 년이 넘었습니다. 이화(梨花), 저렇게 고결하고 아름다운 이화,

이파의 ’나으리 배나무‘도, 있었으면, 이 정도 수령이니, 긍구당 뒤뜰에서, 저렇게 꽃을 피워 내었을 것입니다. 상상만으로도 그림 같습니다. 진안군청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자료 10]



청실배나무는 우리 토종 배나무입니다. 개량되기 전의 우리 배나무인데, 달고 맛이 좋아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이파의 ’나으리 배‘도 아마 이 청실배나무였을 것입니다.




이제, 위 시 내용을 전체적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시어에 내포된 의미들을 알면, 전체 내용은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기와 승에서는 분천의 시작을 적었습니다. 미개지였고, 미개지 분천에 고조와 증조가 처음 터를 만들고 집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전과 결에서는 중국 양진 가문의 청백을 가져와, ’나으리 배‘에 담겨 이어지는 집안의 청백 가풍, 그리고 그 자부심을 적었습니다.





3. 한 그루 배나무를 심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현보가 이 시를 읊어 아들과 조카에게 보인 것은, 그 정신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목이 ’읊어 아들과 조카에게 보인다‘ 아니겠습니까? 알고, 잘 이어가라는 당부일 것입니다.



❙❙ 만년 지조(志操)가 완전한 자의 으뜸 ❙❙ 이현보 자신은 어떠하였을까요? 그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라는 최고 지위의 관료였습니다. 그는 청백한 관리, 청백리였을까요?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얼핏, 청백리는 청렴한 관리를 통칭하는 일반적인 말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의 청백리는 나라에서 주는 명칭입니다. 선정도 나라에서 합니다. 보통명사가 아니고, 고유명사인 것이지요.


청백리로 선정되기는 어렵습니다. 조선 오백 년 전체에 많아야 이백 명 남짓합니다. 오죽하면, 1대 청백리가 3대 정승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엄격한 절차와 심사를 거치고 임금이 재가해야, 비로소 청백리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되기가 어려운 만큼, 실질적 포상을 하여 장려하였는데, 후손에게 과거를 통하지 않고 관직에 나가는 특권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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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명단을 적은 문헌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전고대방(典故大方), 청선고(淸選考),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이 대표적이고, 왕조실록(王朝實錄)과 국조방목(國朝榜目)에도 기록이 있습니다.

문헌마다 명단이 조금 다르기도 하고, 숫자도 적게는 백여 명에서, 많게는 이백여 명까지 실려 있습니다.


이현보는, 왕조실록 외에, 모든 문헌에 실려 있습니다. 두말이 필요하지 않은, 조선 청백리인 것입니다.


왕조실록에 없는 것은, 이현보 당시에는 청백리를 선정하는 것이 제도나 문화로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현보 이전까지, 왕조실록에 기록된 청백리가 열 명이 채 되지 않는 것이 그 방증입니다. 청백리의 상징으로 우리가 배운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도 왕조실록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청선고(淸選考)에 실린 이현보 청백리 기록을 한번 보겠습니다. 좌측 페이지 첫 줄에 이름이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입니다.

[자료 11]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성종조(成宗朝)에 이름이 실려 있는 것입니다. 이현보가 출사한 것은 연산군 4년 1498년이고, 주로 중종(中宗) 이후에 활동하였습니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아닌 것은, 성종 때에 활동한 이현보가 없을 뿐 아니라, 위 이현보 아래 그의 관직 지중추부사가 적혀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저 이현보는 농암 이현보인데, 착오인지,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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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실록에 이현보의 청백리 기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기록이 없는 정황은 전술하였습니다.


그러면 왕조실록에는 이현보를 어떻게 적었을까요? 졸기(卒記)에 그 내용이 있습니다. 졸기는, 사관(史官)이 적어 실록에 올리는, 이를테면 인물에 대한 공식적인 종합 평가 기록입니다.

사관의 붓은 용서가 없습니다. 잘한 것은 잘하였다고 적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덮어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 붓끝은 임금도 피하지 못하였고, 정승도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명종(明宗)은 변덕이 심하다고 적혔고, 교과서에 청렴 정치의 모범으로 나오는 어떤 정승은, 지조가 부족하고 인사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적혔습니다. 세상이 다 아는 어떤 정치가는, 도량이 좁고 시기심이 많다고 적혔습니다.

졸기로 평가된 많은 조선의 관리가 그런 평가를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이 보통 그렇지 않습니까? 장점이 많은 사람도, 부족한 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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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 졸기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약간 의아한 느낌이 들 정도로 한결같은 칭찬입니다.


아래가 명종실록(明宗實錄) 18권에 실려 있는 그의 졸기입니다. 이현보의 사망 사실, 그리고 졸기, 이어 제사와 부의를 각별하게 하라는 명종의 어명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자료 12]


그의 졸기 내용이 이렇습니다. 글로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가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조용히 은퇴하여, 그것을 아름답게 여긴, 중종, 인종, 명종, 세 임금이 잇달아 벼슬을 높여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사적일 일을 관에 청탁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는 완인(完人)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젊은 날, 사냥을 좋아하고 학업에 관심이 없어, 마음 잡고 공부해 과거에 합격한 것이 서른두 살입니다. 관직에 나가서도 인간적인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관의 저 날카로운 붓이 이렇게 한결같이 누그러져 있습니다. 그런 흠결을 사소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그의 평소 처신과 공적이지만, 그 결정적 이유는, 아마 다음 마지막 구절일 것입니다.


청백리 기록이 없는 것이 오히려 무색해지는, 이현보 졸기 마지막 구절을 한번 보십시오.



‖근래에, 만년의 지조가 완전하였던 사람으로, 이현보를 으뜸으로 친다(近來能全晩節者以賢輔爲稱首).


만년(晩年)의 지조,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 일생의 평가 초점이 여기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영양 주실의 선비 시인 조지훈이 지조론(志操論)에서 한 말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분들의 초년을 모른다. 역사에 남은 것은 그분의 후반이요, 따라서 그분들의 생명은 마지막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이현보가 그 으뜸이라고 합니다. 만년의 지조를 지킨 사람의 으뜸이라고, 사관이 적었습니다. 이현보를 아는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하였답니다.


초개같이 벼슬을 버리고 분강(汾江)으로 귀향한 이현보는, 세 임금이 벼슬을 높여 잇달아 불러도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시를 짓고, 갈매기와 소요하며, 세상 이익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만년에, 먼지 세상을 떠나 홀로 우뚝한 모습, 그 모습이 모든 이의 사표가 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사관의 눈이 거기에 머물지 않았겠습니까?


❙❙ 배나무 한 그루는 심어야 하지 않을까요? ❙❙ 이현보가 이 시를 읊은 것은, 아들과 조카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지켜온 청백의 집안 정신을, 아들과 조카에게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아들과 조카에게 말하지만, 아들의 아들, 조카의 조카, 그리고, 백 년, 천 년 후의 후손에게도 보여 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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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가 양진 가문을 말한 것이 상기됩니다. 양진 가문의 청백을 말하며, ’어떠한가(何如)?‘라고 한 것은, ’나으리 배‘로 이어진 우리 집안 청백도 자랑할 만하다는 자부심인데, 문득, 양진의 박물관 생각이 납니다.

그 박물관은 이름조차 ’양진의 청렴한 정치 박물관(楊震廉政博物館)‘입니다. 마을 이름이 사지촌(四知村)이고, 집은 사지당(四知堂)입니다. 이천 년 전 일이지만, 지금 사람들에게 알려, 배우게 합니다.


[자료 13]



어떻습니까? 온갖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 굳이, 아들과 조카에게 보여 읊은 이현보의 뜻을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도, 우리 집 뒤에 ’나으리‘ 배나무 한 그루 정도는 심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끔 일부러라도 가서 보고, 가만히 ’나으리‘라고 한 번씩 되뇌어 봐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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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는, 집 뒤의 배나무를 ’나으리‘라 불러, 그 자신 인생의 지향과 후대에 대한 기대를 담았습니다. 후손들이 관직에 나가, 청백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의 증손 이현보는, 또, 그것이 가풍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도 지켰습니다. 양진 가문의 청백을 말하며, 부끄러운 마음 없이, ’어떠한가(何如)‘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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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이상하고 이상해, 중심 잡고 살기가 쉽지 않은 세상인데, 문득, 배나무 한 그루로 정신을 일깨우는 이파(李坡)의 ’나으리 배‘,

그의 증손 이현보가 아들과 조카에게 보여 말한 '나으리 배'


만년 지조의 으뜸, 청백리 이현보가, 세상의 아들, 세상의 조카에게 보이고 말하는,

낙은유거, 농암종택 긍구당 고가(故家) 뒤뜰의 청실배나무, ’나으리 배‘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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